본문 바로가기
기독정보/유초등부설교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드리자_마태복음 26:6-13_중고등부 청소년 설교

by reviewer_life 2014. 1. 10.
반응형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드리자_마태복음 26:6-13_중고등부 청소년 설교

 

Mt 26:6~13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제목으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더욱 실제적으로 복 있는 사람, 특별히 복 있는 여자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단어와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배라는 단어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예배인지 예배의 본질과 핵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 참된(진정한) 예배자인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일요일 아침부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내가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제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예배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Body

본문 26장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 부류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보면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입니다. 두 번째로는 여인입니다. 세 번째로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 여인은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여러 사람이 존재하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과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또 로마인 마리아...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까지 총 6명이 나옵니다. 가끔 저도 헷갈립니다. 참고로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또한 마리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모두다 이 여인의 행동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말한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집주인인 시몬에 둘러쌓여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즐기고 계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좀 더 자세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런데 제자들은 당장에 이 옥합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봅니다. 그리고는 여자를 책망합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삼백 데나리온은 1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인데, 오늘날로 치면 기술직 노동자가 하루 일당으로 7만원으로 받는다면 2100만원 정도되는 고가의 물품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제자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만약에 제가 2천만원짜리 향수를 한방에 다 뿌렸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꽃남의 구준표가 뿌렸다면 이해를 했을겁니다. 하지만 제가 그랬다면 아마 짱돌 몇 개를 들어서 집어 던지겠죠?

 

마찬가지로 비난의 짱돌을 들고는 제자들이 나서서 여인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그 주축세력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편을 들고는 여인을 싸잡아서 비난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이 유다가 도둑이라고 소개합니다.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들은 말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걸 허비하느냐? 왜 낭비하느냐? 뭣 때문에 이렇게 비싼걸 그렇게 버리느냐? 하고 여인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 말고는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분인지 그들은 너무도 자주 목격했고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께 부어진 향유가 아까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랬고, 가난한 사람들은 빵을 얻기를 바랬고 로마의 식민지배에 있다는 사실을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해방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는 파워가 있었고,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는 힘도 가졌고 그 말씀의 능력이 있음을 사람들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자기에게 콩고물이라도 하나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제자들은 더 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압제자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때 좌우편에 한자리씩 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더 높은지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인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좀 더 의로워 보이려고 앞 다투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척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주님이 제사장들의 병사에 의해 잡혀가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다들 도망갔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amazing?) 이게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의 제자들의 모습 이었다는게 믿어집니까? 우리는 오히려 참된 제자의 모습을 당시에 천대받고 무시 받던 한명의 여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던 마리아와 한몫 챙기려던 12제자들의 못난 모습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 내가 하는 일들이 헛된것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숙제가 무엇입니까?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짝사랑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오늘 이 여인과 같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아가는 사랑일까요? 만약에 여인이 먼 발치에서만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여인의 품에는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앞에 나아가서 그걸 깨뜨려 주님의 머리와 몸에 부을 수 없다면 그 옥합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게 아무리 귀하고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기록이 되었을까요? 향유는 부어져야지만 그때서야 소중해 집니다. 옥합은 깨뜨려 져야지만 그때서야 쓸모가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내 옆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때에야만 진정한 예수 믿는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놀라운 일을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행하고도 사랑이 없이 행했다면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나는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말이나 전부 다 싫은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는 저 사람 절대 절대 네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 마칠때 함께 외우고 있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말로만 하는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을때 우리의 죄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옆에 있는 보이는 사람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봅시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한 사람의 여인이었습니다. 모두들 자기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이고 힘든 시기에 판가름이 납니다. 어떻게요? 시대마다 그런 시험들이 있어왔습니다. 창과 칼 앞에서 니가 예수 죽을래 아니면 안 믿고 살래?”라는 질문 앞에 누가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식민지때에도 그러했고, 육이오 전쟁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현장인 중국과 이슬람국가에서는 아직도 많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려 든 적도 많지는 않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더욱더 치밀해지고 정교해지고 고도의 술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총칼 대신에 문화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루라도 인터넷이나 티비나 라디오나 엠피쓰리를 사용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아마 미쳐버리겠죠? 단적으로 텔레비전만 봐도 티비에서 쏟아내는 엄청나게 더러운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해가는 문화인지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닫고 있습니까? 우와 멋지다 싸움 잘하네. 그렇게 보고 있는 사이에 그런 폭력성이 사람들을 물들여 갑니다. 살인을 하는 잔인한 장면을 봐도 무감각해집니다.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죠. 또 얼마나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게 합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문화도 많잖아요? 티비에서도 좋은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어요. 인터넷에도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수없이 좋은 문화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20년 전에 동성애가 오늘처럼 많았을까요? 20년전에 오늘처럼 원조교제가 판을 치고 있었을까요? 20년 전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오늘처럼 많았을까요? 20년 전에 오늘처럼 폭력성 짙고 음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또 교권이 무너졌다고 표현하죠? 많은 선생님들이 더 이상 학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오히려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휘두르는 폭력에 멍들어가고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의 문화가 주는 충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나이가 어릴찌라도 이 세상에 있는것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생각한 결과이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매일 게임만 생각하고 열심히 게임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프로게이머가 되어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요즘 시대가 오락 중심 즐기는 중심으로 변하다 보니 직업도 그런쪽으로 많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매일 음란한 생각을 하고 음란물을 열심히 보고 그걸 즐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망쳐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문화를 통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사단의 그리스도인 파괴 전략은 때로는 총칼 보다 더 잔인하고 더 무서울 수 도 있습니다. 사람을 마비시켜버리고 서서히 말려 죽입니다.

 

이런 문화를 이겨내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문화의 전쟁속에서 세상과는 구별되어진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통해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며, 예배를 통해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해답입니다. 예배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봅시다. 그 여인의 예수님을 향한 섬김은 예배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을 향한 섬김이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들어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죄의 회개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안타까운 죄악들 때문에 예수님께 울며 나아가서 그 발에 입맞추고 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예배에는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러브 소나타가 울려 퍼지게 들리십니까? 사랑의 향기가 느껴지십니까?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로 우리가 옥합속에 든 향기입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부어드릴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 아름다운 일을 했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정마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네가 나를 위해 참으로 아름다운 예배를 드렸구나. 내가 너 때문에 진짜 기쁘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이제 알겠구나. 내가 너를 높여주게다. 그리고 내가 너를 들어 사용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