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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자!_눅19:28-44(누가복음 19장)

by reviewer_life 201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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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자!_눅19:28-44(누가복음 19장)

 

[누가복음 19장 28-44]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향유옥합을 깨드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한 여자를 살펴보았습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통해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며, 예배를 통해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열쇠가 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교회절기 중에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맞이했는데 이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다음에 부활주일)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누가복음 19장을 통해서 우리가 예배 드려야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증거하겠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자! (눅 19:28-44)

우리의 삶에 만남은 너무 중요합니다. 학교 선생님과의 만남은 한 아이의 평생을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진실 된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만남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위 유명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대통령, 연예인, 운동 스타들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만약 그들 중 한 사람이 내일 저녁 여러분의 집을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그 손님을 맞도록 집안을 청소하고, 옷을 준비하고, 음식도 정성껏 준비할 것입니다. 비디오 카메라도 빌려오고 디카도 가져와서 그 만남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한쪽에 설치해 놓을 겁니다. 그 손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연구해 볼 겁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의 방문을 기대하십니까? 언제 최고 중요한 손님이신 예수님이 오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눅 19장에는 특별한 방문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입니다. 눅 19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오심과 방문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방문을 알려면 예수님과 누가 당시 즉 로마시대의 ‘파루시아’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파루시아는 원래 '오심', 방문, 현존, 도착이라는 뜻입니다. 주로 황제나 왕, 고위 관리의 방문을 말합니다. 왜 2000년전 로마제국에서 사용된 ‘파루시아’라는 말이 오늘 말씀을 아는데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이방인이었고, 누가복음의 독자들도 누가처럼 이방인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독자들이 잘 알고 있던 그 당시 문화적 관습을 사용해서 눅 19장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1 세기로의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로마 황제와 같이 어떤 높은 손님이 어떤 도시를 방문합니다. 방문을 받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성 밖으로 나와서 그 손님을 맞이합니다. 높은 관리들이 서열에 따라서 줄을 맞추어 그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 중 일부는 방문하는 손님의 위업을 칭송하는 글을 읽습니다. 그리고는 그 손님을 호위해서 성안으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손님을 환영하면서 거창하고 화려하게 맞아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손님으로부터 특별한 호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도시의 잘못에 대해서 벌을 내리러 오는 왕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입니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유독 누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을 긴밀히 연관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실패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왕'으로 방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눅 18장과 19장에서 계속 왕으로 묘사됩니다.

1. 본문 바로 앞 눅 19:12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왕위를 받으려고 멀리 떠나는 귀인의 비유. 그 귀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2. 30절-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 구약 (민 19:2)에도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드려질 짐승은 흠 없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짐승이다.
3. 31절-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명령- 나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님.
4. 36절- 무리가 옷을 바닥에 깔아서 예수님과 나귀가 지나도록 하는 것 (왕하 9:13 에 보면 엘리사가 선지자로 활동할 때 아합의 집을 심판하기 위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후가 왕으로 즉위 할 때도 사람들은 옷을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라’고 외쳤다)
5. 38절- 제자들이 외친 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지만 로마 황제나 왕의 방문과 달리, 예수님의 예루살렘방문은 너무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고위 관리도 없었고, 대제사장,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맞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하는 말이나 찬송도 없었고, 예수님을 성안으로 호위하여 모셔 들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39절에 보니, 바리새인들은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어 잠잠케 하도록 하시오’라고 당돌하게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맞이하고 호산나를 외쳤다고 기록하는 마가와 달리 (막 11:8), 누가는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만 예수님을 환영한 것으로 축소시켜 말합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으나, 실제 반응은 경멸과 수치 그리고 모욕이었습니다. 이런 수치는 누가의 독자들이 기대했듯이, 벌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이 환영하지 않았던 그 마을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주님 불을 하늘에서 명하여 이 마을을 불살라 버리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은 적이 있습니다 (눅 9:54). 이 사실은 방문과 환영이 얼마나 중요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까요?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조상 때부터 기다려왔고 꿈꾸어왔던 메시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대대로 하면 예수님은 크고 건장한 말을 타야 되는데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자기 민족을 압제하는 로마를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41절에 보니 울고 계십니다. 이런 나약해 보이는 예수님을 그들은 환영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본문 43-4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던 이유를 44절에서는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권고 받는 날이란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준비하지 못하고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단순히 어떤 큰 성이 파멸되었다는 의미를 너머, 이제는 혈통적이고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동반자가 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바로 뒤 45-46절 성전 청결사건이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슨 의의가 있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방문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일지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계 2:16에 ‘버가모교회’에게 승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단을 용납한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속히 임하여 너희와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즉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은 방문하셔서 현재적인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합니다. 요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왕으로 찾아오시되 화려한 모습으로 삐가뻔적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기로 태어나실 때에도 큰 도시가 아니라 시골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볼품없이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환영하고 칭송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방문은 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여전히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화요 심판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상황은 누가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임박한 심판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우리 삶의 왕과 주님으로 온전히 모시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 주님 하지만 정말 우리는 예수님을 주요 왕으로 인정하며 고백합니까? 우리 자신의 안락함, 건강, 공부, 돈이 왕 노릇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하면 나의 생활에 예수님이 왕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가정과 공부에서 예수님이 왕이요 주님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을까? 교회에서 섬길 때 주님이 왕으로 영광을 받으실 길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는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환영하여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왕이신 주님이 우리 교회와 생활에 왕으로 거하도록 합시다. 우리 이렇게 한번 살아봅시다. 주님이 우리의 왕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우리의 복이요, 형통입니다. 우리 생활에 주님의 왕권, 주권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화요, 심판입니다. 모두 주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 생활 중에 주님의 왕권, 주권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때 불신자들도 주님을 자연스럽게 환영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생활 중에 드러내면서 사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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