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현대성과 세상의 본질
‘세상’은 인간본성이 타락한 결과 생겨난 문화풍조, 사회제도, 생활습성 등을 일컬을 때 성경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가 그 선함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본성이 타락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으로 인한 삶의 혼란은 개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영향을 주는데, 인류전체의 타락성은 개인의 타락성의 근거가 되고 개인의 타락성은 인류전체의 타락성을 더 악화시킨다. 오늘날 서구의 상황에서 불신의 개연성이 현대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현대성은 많은 면에서 성경의 저자들이 세상(결코 순수하거나 중립적이거나 무해하지 않은 실재)을 말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오늘날 재현된 것이다.
내면의 자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만이 세계의 매력과 유혹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며, 문화적인 적절성을 가질 수 있다. 정신적·도덕적으로 세상문화와 단절된 사람은 그것을 변화시킬 사람이다. 세상문화에 속해있는 사람은 그 과정의 업적과 만족을 성취하지만, 세속문화에 큰 은혜를 입고 축복의 근원에서 단절된 상태가 가장 불쾌한 사실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허풍스런 세상
신약 성경에서 ‘세상(헬라어: kosmos)'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1)대지, 창조질서, (2)나라, 인간사회, (3)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와 불화하고 타락한 인류의 습성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서구문화의 ’현대성‘에 상응하는 정의는 세 번째 의미다. 이 의미가 신약 성경에서 나타날 때, 사회적인 실재가 아닌 신학학적인 실재를 뜻한다. 세상성을 인식하려면 신학적인 이해와 판단이 요구되는데, 오늘날 교회에는 바로 그와 같은 신학적인 이해와 판단이 사라진 상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를 생략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펴보려는 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세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된 물리환경인 땅을 가리킨다. 또한 창조된 이 세상의 의미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 선하심, 진노를 보여준다.
둘째, ‘세상’은 인간 공동체(전 인류)를 가리킨다. 복음과 세례를 베풀도록 명령받은 것도 바로 모든 인류임에 분명하다.
최근들어 창조에 대한 성경의 이해와 그 관계가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으나,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가 ‘세상’의 이 두 의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내세에만 치중하는 태도는 결코 올바르지 않다. 교육과 종교를 분리하려는 세속주의는 사회와 실제적인 연관성을 제거해서 하나님을 고립시켰고, 현대 생활은 엄청난 혼동과 고통을 조장해서 섭리교리와 삶의 모든 방면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대한 교리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창조의 기원, 현 상태, 운명 등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단숨에 창조주와 별개로 분리되어 자체적인 생존과 이유를 찾아야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주제들이 오늘날 기독교 사상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강단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사소하거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특히 ‘세상’이 지닌 세 번째 의미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겪고 있는 곤경이고, 초현세성에 대한 성경의 요구를 듣는 것도 바로 이 세 번째 의미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의 세 번째 의미는 타락한 인류전체 곧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 그분의 진리를 받는 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 그분의 메시아를 믿는 일 등을 거부한 세상의 모든 집단적인 발상을 가리킨다. 이 세상은 살면서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채 지상에서 살아가는 일차원적인 인간들이 유일하게 관심 갖는 대상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인내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처음 두 가지 의미에서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세 번째 의미의 세상을 견디도록 애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사회생활(그리고 거기에 동반된 문화)이 하나님 대신 자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통로다. 그것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 이기주의, 자기만족, 자기허세, 자기자랑 등의 특징으로 하는 삶이며 그런 특징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나타난 자기 부인의 고유한 특성을 혐오한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는데, 상반된 두 가지 방식의 자아상과 세계관을 구별해 준다. 요한 사도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하나 세상은 사탄과 세상 임금에 속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은 영원히 지속되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덧없이 지나가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전혀 어울릴 수 없다.
교회가 ‘초현세적’ 이어야 하다는 말은 이렇게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교회는 자신의 도덕적·영적 가치와 세상의 가치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을 만들어 내는 지식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하나님이 짓고 다스리시는 또다른 도성을 열망하므로, 세상의 어둠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쉽게 지속할 수 있는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은밀히 다가오는 불신이 항상 신자들을 위협이 되는 탓에, 이질감이 점점 뚜렷해질수록 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서로 돕는 수단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인생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지식이 정말 중요하고 절대적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토록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교회와 세상의 가치 간에 간격이 커질수록 신자들은 도덕과 인식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유지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광야 성인의 성품’을 닦아야 할 필요성이 더 절실해진다.
볼트만은 요한 사도가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자유와 구속, 삶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네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삶의 본질 사이의 이런 대조를 구체화했다고 주장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빛과 어둠의 이미지가 여러 분맥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빛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데, 그와 같은 문맥에서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구절에서는 빛은 도덕적인 정결함을 나타내는 반면, 어둠은 도덕적인 타락을 의미한다. 윤리적으로 옳은 것은 지적으로 옳은 것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자신의 행실로 그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요한 사도는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강조한다.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 어둠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어둠이요, 그것은 죄에 대한 사랑인데, 요한 사도는 그것을 시각적인 장애와 동일시한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빛과 어둠의 대조는 진리와 오류, 자유와 속박, 삶과 죽음의 구별로 이해될 수 있다. 진리는 단순히 사회적인 편견과 인식에 때묻지 않은 지식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다. 진리는 견고하고 안락하면서도 비윤리적인 세상 관습에서 끄집어 내고 죄에서 분리시켜 자유를 주는 힘이 있다. 진리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요, 생명을 소유한 것이다. 진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만물 위에 죽음의 악취를 풍기는 어둠과 거짓과 타락에 빠지는 것이다.
지금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인가? 불교나 힌두교에서 각성한 사람들이 환몽과 공으로 이루어진 경험계를 벗어나 실세계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이원론은 분명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그리스 철학(특히 플로티누스)의 이원론도 아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가 나뉘어 서로 나뉘어 서로 투쟁한다는 식의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 이단의 이원론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윤리적인 ‘이원론’이다. 그것은 물질계와 육체를 본래부터 악하다고 간주하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영적인 체허을 순수하고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선악이 모든 창조 가운데 공존한다고 말하며, 이미 결론이 났으나 여전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게 성취되는 전투와 선악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이원론인데, 신약 성경은 오는 세상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이원론’은 종말적이요, 철저히 윤리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관계에 깊은 의미를 갖는다.
사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는 세상’의 시작,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날 대단원, 그리고 하나님의 중심성과 통치에 맞서 자신을 내세우던 모든 것에 대한 그리스도 왕국의 승리가 모든 역사의 중심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세상’과 ‘세상’이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세상’ 전체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탄을 ‘이 세상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영적인 부활로 ‘이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옮겨진 것이 사실이라면,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을 알고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중심
신약 성경 저자들은 어떤 개념과 범주를 설명하거나 규정하는 반면, 시사 잡지들은 있었던 사건들을 요약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요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염두에 두는 ‘세상’과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가 말하는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보는 반면, 세상 저자들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본다. 그것은 성경의 관점을 신학적인 지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은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과 인간사에서 구원 작정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방식과 연결시켜 세계를 바라보라고 촉구한다. 반면, 세상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도덕 의지, 구원 작정, 하나님의 진리, 그리스도가 의미나 중요성의 척도가 되지 않는 신념 체제로 세계를 바라보라고 강요한다.
우리는 오늘날 서구 사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을 목격할 수 있다. 하나는 오직 자연적인 것만을 인식 범위로 제한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기준으로 자연적인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방식이다. 전자의 관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의미를 받지 않는 반면, 후자의 관점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의미를 받는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이 모든 차이가 발생한다.
포스트모더니즘
1960년대에 계몽주의가 지향하던 계획이 좌절되므로, 오늘날 이 같은 양자택일은 내혹하면서도 철저하다. 계몽주의 지지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연 이성(natural reason)의 테두리 안에서도 의미와 도덕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진보가 필연이라고 맹신하던 그들의 망상은 20세기가 보여 준 잔혹함과 온갖 실패로 말미암아 무참히 깨졌다. 실제로 이런 과학 기술의 성과가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미명으로 오히려 그 행복을 해치는데 쉽게 악용된 사례가 많았다.
1960년대가 끝날 무렵, 현대성은 계몽주의의 열정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탈현대성(postmodernity)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생명공학과 컴퓨터 공학과 과학 기술, 그리고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예술, 건축, 문학, 대중문화 등에 허무주의 인식을 고조시킨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자아상에 대해 보여 주는 다소 절망적인 성향은 많은 계몽주의 지지자에 대한 배신감과 일치한다.
계몽주의는 진리, 자유, 정의 같은 기독교 덕목을 인간적인 가치로 대체하고 그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회적·정치적 구원의 수단이라고 선전했다. 이런 구원의 약속은 오늘날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는데, 계속되는 절망 속에서 오늘날 탈현대주의자들은 모든 ‘거대담론(metanarrative)',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의미에 대한 확신, 초월적인 질서에 바탕을 둔 모든 신념과 가치 등을 맹렬히 비난한다. 현대성은 탈현대주의자들 가운데서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지식의 정복자를 만들어 낸 셈이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모더니즘의 체계(도시화, 자본주의, 과학기술, 정보통신)는 제자리에 두면서도 그 희망은 제거한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신념을 빼앗긴 채 절망 속으로 침잠하는 또다른 형태의 현대성을 만들어 내는 형편이다. 탈현대주의자들은 기독교가 현대성을 훨씬 수월하게 비판하도록 도왔으나, 계몽주의의 의미를 포함한 ’모든‘ 의미에 대한 그들의 적대적인 공격은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을 약화시켰다.
모든 경계와 금기는 사라진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거대담론’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을 능가하는 의미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영역 안에서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예절과 무례의 구분이 붕괴될 뿐 아니라 부적절하다.
현세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인본주의의 유해성은 대중매체의 왜곡된 환경에서 목격하는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으나, 무해한 듯 보인다는 그 이유로 더 큰 위험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더 은밀한 증거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는 여러 신념과 전체를 기초로 움직인다.
자본주의 질서는 삶에 대해 가능한 모든 가설을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 질서는 모든 이에게 혜택을 베풀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운 삶의 ‘합리화(rationalization)'까지 이끌어 내는데, 그것은 철저히 현세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경제적인 수단과 목적이 가장 효율적으로 결합된 방식이요, 이동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요구하는 방식이요 수요 공급 법칙은 중요한 윤리 체계에 뿌리내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성시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아로 둘러싸인 현세적인 체제, 곧 한편으로 경쟁과 다른 한편으로 익명성과 관료 체제가 만들어 낸 기풍에 이르게 된다. 베버는 그것을 ’철창‘이라 부른다.
그 ‘철창’에 갇힌 상태로 삶을 생각하는 일, 삶의 모든 것이 자본주의 방식을 따른다고 추론하는 일, 효율성에 궁극적인 가치 기준을 부여하는 일 등은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부를 만큼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요, 영적으로 ‘현세적’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몸에 베여 인식하거나 의문시 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인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죄인들을 혼란시켜 실재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편협한 인식력은 윤리 관념을 왜곡한다. 요한 사도의 표현대로, 그들은 세상에 속박되는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즉, 그들은 어둠을 ‘사랑’하게 된다. 어둠에 현혹되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독단적인 방침이라고 일축하려는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우상화
우상숭배와 형상을 이용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금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 때문이요, 창조 안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시기 때문(즉,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표현하려는 계획은 하나님을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표현할 뿐이다. 키이즈(Richard Keyes)는 영적인 형태로 내면에 자리잡은 것이 진짜 우상이라고 주장한다. 마음(확실히 현대인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우상숭배는 예나 지금이나 독특한 신적인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 대신 다른 대상을 신뢰하는 행위다. 반드시 초자연적인 존재일 필요는 없다. 돈, 권력, 전문지식, 점성도에 나타난 행성의 위치, 진보에 대한 확신 등이 우리시대에 가장 인기있는 우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상황이 자아를 없애기는 했으나, 자신의 심리적인 자아와 육체적인 자아를 우상숭배에 사용해 자신을 더 부실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었으며, 영혼보다 육체에 점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 점과 관련해 성적 매력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될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독교회 신학자 헤이워드(Carter Heyward)교수는 성경험을 ‘성 우상화’라고 말한다. 자신의 글 표제에서, “내가 여신을 가장 깊이 경험한 것은 애인과 함께 있을 때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 특히 절정의 순간에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고 말한 신학생의 체험담을 인용한다. 이것은 신격화된 체험이다. 그것은 진짜 대상이 대신한다.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대상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미연에 방지하기 때분일 것이다. 우상은 자신이 직접 만든 대상이므로,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우상을 만날 수 있다. 우상은 안전하고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비유대로, 우상은 “오이 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렘10:5)다. 시내 산에서 우레를 발하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위험하게 보일 때가 많은 섭리를 베푸시는 위협적인 하나님과 달리 우상은 안전하다. 키이즈는 “삶과 헌신의 중심에 서서 미래를 자율적으로 설계하는 사람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와 대면하는 것을 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과만 대면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매력이다. 우상숭배자들이 섬기는 우상만큼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과 우상숭배에 앞장선 사람들이 거룩한 심판의 불로 소멸된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들은 엄청난 영적인 실재를 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구제불능의 시각 장애자였다. 세상성은 종교적인 문제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은 하나님과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신해 스스로 신앙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세상은 거짓된 의미를 제공한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약4:4)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세상성과 함께 퍼져나간다. 성공한 기업가 정신, 기업이 주는 매력, 혹은 복음주의 활동을 홍보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인 양 뽐내면서 온화하고 친절히 다가온다. 기업가 정신, 조직의 매력, 대외 선전, TV 이미지, 대중 잡지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이런 것들 속에 기독교 신앙을 적대하는 가치가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오늘날 복음주의의 무능함이 문제다. 또한, 타락한 가치가 그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 상황에서도 현대성이 손쉽게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뿌리치지 못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함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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