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종교론]에 그의 신학사상이 가장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다섯 가지의 변론으로 되어 있는데 제 1 강론은 변증론, 제 2 강론은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제 3 강론은 종교교육에 관하여, 제 4 강론은 종교 내에서의 교제에 관하여, 제 5 강론은 종교들에 관하여 이다. 이 책은 이제껏 지성의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해오던 사람들에 대해서 종교의 본질은 마음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종교는 지식이나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헤겔에 대한 비판). 또 칸트에 대한 비판으로서 종교는 행위나 도덕도 아니다. 종교는 정서, 감정의 문제요 직관의 문제다. 종교라는 것은 우주에 대한 직관. 여기서 우주라는 말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의 책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다. 그는 기독교를 변증을 하기 위해서, 아예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가지는 용어는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인들과 함께 종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종교를 우주에 대한 직관으로 너무 표현하다 보니깐, 그의 사상이 범신론으로 오해를 받았다. 실제로 유신론과는 전통적으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실천은 예술이고 사변은 학문인데 비해서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정이고 취향이다.
제 1 강론에서는 화자와 청자를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신학자이고, 청자는 소위 교양인들인데, 이들 청자들은 당시에 자유로운 정신 가운데서 예술과 철학으로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을 말하며, 특별이 낭만주의 계열의 지성인들이다. 당시의 지성인들은 종교는 몰락했다고 말했다. 1강론에서 화자(신학자)는 자신은 종교의 몰락에 동조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류의 거룩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제 2 강론은 1800년대에 나온 가장 대표적인 글로 인정받고 있다. 제 2강론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과는 다른 지관가 감정의 영역 안에 있다고 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도 행위도 아니고, 직관과 감정이다. 이 종교야 말로, 인간 존재의 중심축이라고 말한다.
제 3 강론은 종교의 교육의 문제인데, 여기서 그는 종교가 먼저 영원하다, 종교의 특징을 연속, 부단하게 작동하고 생동하는 것이라고 규명한다. 종교에 대한 교육은 언어로만 되지 않는다. 종교의 교육은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내면 세계에서 우주를 직관하는 그런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직관은 계몽된 오성(이성)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이성으로부터 직관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제 4 강론은 교회론을 다루는데, 우주를 경험하고 우주를 직관하는 것은 여러 개별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제의 문재가 생긴다. 제도 교회(Kirchentum)와 참 교회(Gemeinde)를 구분한다. 제도 교회의 특징은 비교제성이 없고 참 교회는 교제가 있다. 이 사상은 에밀 브룬너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브룬너 쓴 [교재에 대한 1800년 간의 오해] 라는 책이 있다. 제 4 강론에서 이 참교회와 종교라는 말이 같이 쓰인다. 국가교회, 민족교회 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형제들간의 유대가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
제 5 강론은 종교의 현실, 실제성을 다룬다. 여기에서 교회의 다양성을 처음에 인정을 하고 나중에는 종교의 다양성도 인정을 하게 된다. 계몽주의의 자연종교는 비판한다. 그것은 너무 독단적이라고 비판하며, 너무 도덕적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너무 철학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자연종교를 추상종교라고 비판하고 그것의 반대편에 실증적 종교가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이다 라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그가 살던 시대는 사상적으로 독일의 관념론과 낭만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고전주의적인 정신이 새로운 시대의 풍토속에서 부흥되던 시대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그는 목회자로서 종교개혁 때 주장되었던 고전적인 시대적 유산과 교리적 체계로는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대에 맞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청자들의 지적 경향에 맞는 기독교를 제시해보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도교를 재 상품화 해서 제시 하려고 함. 이런 변질 속에서 그의 사상에 여러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는 신앙을 너무 지나치게 감정의 지평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편향적 이해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지적, 의지적인 측면 모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거룩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적인 측면 모두가 다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너무 편향적이다.
둘째, 그의 사상이 범신론이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 인격적 하나님의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의 개념을 추상화 시키고 형이상화 시켰다.
셋째, 그는 교회의 변질을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국가는 간섭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럽적인 측면에서는 수긍할 수 있으나, 이것은 교회의 변질에 대한 현상적, 사회학적 이해에 불과하다. 교회의 문제 분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넷째, 기독교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데, 그러나 결국 기독교도 일반 종교적 차원으로 접근을 한다. 계시 종교로서의 특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교도 인간의 감정으로 출발한다는 전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섯째, 지나치게 개별자의 직관과 감정을 앞세우므로 주관주의의 늪에 빠져있다.
여섯째, 종교 복수성을 용인하므로 종교 다원주의 내지 상대주의에 빠져있다.
일곱째, 종교와 신학을 너무 심리화 시킨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신학을 할 때, 철저하게 성경이 신학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데, 만일 슐라이에르 마흐 처럼 인간의 거룩한 감정이 출발점이 되면, 결국 신학의 기초는 인간의 감정, 심리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계시 신학이 아니라, 의식 신학이 된다. 신학의 의식과, 신학의 인간화, 신학의 내재주의적 형태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신학의 방법과 형태는 모두 내재주의적 신학이다.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므로 탈 교리화 등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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