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학]
이 책은 그의 말기의 책이면서 완숙기의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19세기의 개신교 교의학에 새로운 경향을 열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이 책(교의학)은 굉장히 탈정통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의식, 종교적 자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책은 세 단계가 있는데, 먼저 자아의 의식, 그 다음 세계, 그 다음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주제로 되어 있다.
종교적 자아에 대한 의식은 동물적 수준(자아와 세계간의 아무런 구분 이 없다.), 세계에 대한 의식은 자아가 세상으로 분리되는 단계(차츰차츰 자아의식이 생김, 또한 세상에 대해서도 자아의식이 생기며, 나중에 가서는 세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이 때는 학문과 문명이 발달하는 계몽적 단계이다. 자유와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신의식은 종교적 단계(두 번째가 자유의 단계인데 반해서 이 단계는 의존의 단계이다. 여기서는 절대적 의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그것은 필수적이다. ) 이다. 인간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두 번째 단계는 결고 극복되지 않는다. 늘 우리의 삶은 늘 세상 적인 소유를 완전히 극복 할 수 없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으로 갈 수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건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그는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감정’ 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슐라이어마허가 이해한대로 라면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뭐냐?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경건의
1.목적론적 뱡향에 속해 있는 하나의
2.단일론적 신앙의 형태이다.
3. 그리고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성취된
4.구원이 관계되어져 있다는 점에서 타 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는 최고의 단계인 단일신론에 속해 있다. 그리고 목적론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 목적론적이 무엇이냐? 그에 의하면 심미적이란 말과 반대되는 것인데, 목적론적이라는 것은 능동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구원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유일한 특징인데, 그것은 구속의 경험,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실존의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우리가 볼 때는 좀 삐딱해 보이지만, 당시의 예수님을 도덕적 인물로만 보았던 상황에서 구속주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제시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구원은? 그 구원은 바로 인류를 새롭게 하는 종교의식의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종교의식이 가장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왜 그가 교의학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교의학이라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는 모든 기독교 교리를 신앙주체의 종교의식에서 보기 때문에, 칼빈이나 멜랑히톤 처럼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객관적 성경에서 세운 것이 아니고, 그는 늘 신학을 신앙이라는 주관적의미로 세웠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은혜를 들어서 은혜의식이라고 하며 죄를 들어서 죄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적인 은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서 그러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굉장히 불교적으로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소중함을 중요시 여긴다.)
이제 결론을 내리면, 이 세 번째 책은, 하나님을 의존감정의 대상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의존감정의 대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지성의 대상도 되신다.
두번째는 그보다 더 중요한사실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격의 한 측면만 접근하는 것은 너무 편향적이다. 둘째로 신앙을 의식적으로, 마음속에서 나오는 소산물로 이해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셋째로 슐라이어마허의 모든 신학은 신의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내제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결국 그것은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학을 신의식에 기초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갖는 신의식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대주의로 ..
넷째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주관에 의해 조절 가능한 모습으로 이해한다.
다섯째로 죄와 은혜의 교리에 있어서, 그는 성경적 원리를 떠나서 신의존의 감정 차원에서 이해를 한다.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 여섯째로 그는 성령 하나님을 신 의식적 에너지로 이해한다. 미래의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를 하지 않는다. 종말 사건도 상당히 관용적으로 이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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