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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신학적 입장 & 복음과 문화의 관계: 상황화 & 선교사의 자세

by reviewer_life 2014.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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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신학적 입장

 

타문화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께서 타문화를 잘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타문화도 하나님께서 일반은총가운데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나 창조물에 대해서 3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첫째, 세상의 문화나 창조물에 대해서 부정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예를 들면 영지주의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으로 여기는 가운데 세상의 창조물과 문화를 부정했다. 이러한 문제점이 사도바울의 서신서인 디모데에 잘 나타나 있다. 영지주의 이단이 영혼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원론에 의해서 결혼과 음식을 폐하는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자연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사도바울은 엄격하게 비판한다.

둘째, 문화와 창조에 대해서 우상시해서도 안된다. 대표적인 사상이 배금주의 사상이다. 즉 돈을 숭배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배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의 창조물과 문화를 잘 이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그리고 현대과학기술등 이러한 것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한 업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잘 사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기독교문화에서 사용되어진 문화들 가운데 종교적 요소가 없어진 건축문화, 음악문화 등 다양한 문화들을 선교사들은 선용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없이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진공가운데서 복음전하는 것과 일반이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에서 세상을 순례하는 천국의 상태는 평화를 이루게 하는 옛 관습이나 법이나 그리고 조직들을 파괴하거나 파멸시키지 않고 그것 들을 향상시키고 유지 시킨다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세상의 문화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거나 발전시키는 긍정적 입장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역사에서 복음과 문화에서 문화의 사용의 예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것이 천주교의 제수이트 교단에 잘 나타나 있다. 제수이트 신부로서 복음을 전하는데 문화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한 사람은 요한 타우렌(Johann Thauren)이었다. 그에 의하면 타문화를 사용할 수 있는 범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외적인 것(의복), 둘째, 언어

셋째, 미학적인 것, 교회의 건축양식, 내부장식, 그리고 예배의식

넷째, 사회제도, 법적 제도 예를 들면 결혼제도

다섯째, 지적인 것

여섯째,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면

이러한 범주를 복음전파에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그는 제시하는데

 

첫째로, 일반은총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그 타락의 결과가 모든 사고방식과 행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으며 사람들을 완전히 타락해 버리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이방세계가 그 깊은 본성의 면에서 볼 때 잘못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 대해 완전히 반역하고 있거나 완전히 도피하고 있지는 않다. 여러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억제하시는 역사가 있으며 사람들이 완전히 형벌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사가 있으며, 사람들이 완전히 형벌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하나님의 어떤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다. 또한 바울이 굉장한 놀라움을 가지고 서술한 양심의 작용도 있다(2:14,15). 도덕적이고 법적인 영역이나 혹은 다른 영역들에서 우리는 자주 예기치 않았던 놀랄만한 가치를 발견하곤 한다.

 

두 번째, 많은 전통문화들이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었거나 단순한 사회적 의식으로 전락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들을 잘 선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선교지 문화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가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존재함을 아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 상황화

 

a.복음과 문화의 구분(The Gospel Versus Culture)

첫째로, 복음은 모든 인간 문화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서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복음과 문화를 구별하는데 실패한 것은 현대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약점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많은 서구 선교사들 역시 자기문화의 배경과 복음을 동등하게 다루어 왔다. 마치 서구문화가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강조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원주민 관습을 비난하고 회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겠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하에서 선교사의 서구 문화와 관습을 주입시키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외국의 것으로, 특별하게는 서구의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실수가 한국의 선교사들에게도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기독교가 급성장한 것을 예를 들면서 한국식으로 교회를 운영해야한다는 주장가운데 통성기도를 강요하거나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자랑하면서 한국문화를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 외에 한국식 기독교문화를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내용이 선교사의 문화와 항상 구별되도록 조심해야 한다.

 

b.문화속의 복음(The Gospel in Culture)

복음이 인간 문화들과는 구별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반드시 문화적 형태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도구로 적절히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찬송가가운데 한국적 곡에 맟추어서 작사 및 작곡된 복음송과 찬송가는 연령층이 높은 성도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문화를 잘 사용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사였던 바울의 선교방법이 선교지의 문화적 상황을 잘 이용했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방법은 한마디로 유연성(Flexibility)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원리가 고전 9:19-22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그는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율법의 대가이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없는 것처럼 활동했다. 이러한 태도가 원칙에 입각한 그리스도인의 눈에 비칠 때에는 카멜레온처럼 변화에 민감한 기회주의자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옳게 인정받는 것은 그러한 태도의 목적이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선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사용하는 표현으로 한다면 수용자 중심 혹은 눈높이 선교에 능숙한 선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교회사가 채드윅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바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다방면에 걸친 고도의 능력들과 그가 상대하는 대중들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었던 적응성 때문이라 하겠다. 그는 원래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복음을 헬라세계에 맞는 언어로서 구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이를 보아 최초의 기독교 변증가로서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게 혹은 문화를 잘 사용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비시디안 안디옥에 방문했을 때 회당 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를 설명했다. 둘째, 그러나 사도행전14: 17절에서 사도바울은 루스드라에 있는 농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설명했다. 대상에 따라 유연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루스드라 사름들에게는 사도바울은 자연 현상이라는 일반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을 그들의 눈높이에 맟추어서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바울의 복음전도에 대한 접근법이 지니고 있는 유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알고 있으며 볼 수 있는 그들 주위의 자연에 초점을 맟추었다. 그는 그들에게 헛된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말했다(15)

 

셋째, 사도행전 17장의 설교 대상과 문화는 지식인 헬라인이며 종교인이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알고 있는 종교적 지식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특히 17장에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유대인들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사용하는 신적인 존재의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그 다음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만 처음에는 그들이 알고 있는 신의 개념으로 신을 이야기한다. 또한 사도행전 17장의 원어를 살펴보면 아테네의 사투리를 사용해서 대화 그리고 설교내용도 시적이고 은유적이었다.

1724절은 플라톤의 저서 티마우스(Timaeus)에서 인용

1725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인용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분이다(26-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BC6세기 크레테의, 그노소스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에게서 인용한 것이다.

27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는 플라톤의 공화국(Republic)에서 인용한 것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다

17:28-29: 이 인용구는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출신인 BC3세기의 스토아 학파 저자 아라투스(Aratus)글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스토아 철학자인 클레안테스(Cleanthes)가 그 이전에 쓴 시를 되풀이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Menander(고전 15:33)Epimenides(1:12)도 인용한다. 사람들과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세속화된 때에는 진정한 인간미, 보편적인 초월에의 추구, 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갈망, 자유에의 추구, 또는 개인의 중요성 등에 대한 열망 등이 그 접촉점이 될 것이다.

 

양극단의 위험: 일반계시에 대한 가치를 결정할 때는 그것에 대해서 과대 평가(로마 천주교의 자연 신학)하거나 과소 평가(일반계시를 부정하는 Barthianism)하는 위험

일반은총의 가치와 중요성: 이방세계와 관련하여

자연 및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이방종교와 문화들의 기초를 제공

이방인조차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느낌(17:28)

 

가치: 복음의 접촉점으로서의 가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비록 구별될지라도 서로 나란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종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일반계시를 통한 접촉점으로 특별계시로 연결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c.문화에 대한 복음

복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 될 것을 시도 할 뿐만 아니라 문화 속에 담겨있는 비성경적 요소 즉 죄악 된 요소를 변혁시키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모든 문화가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신학은 문화의 긍정적인 가치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고도 사단적이고 비인간적인 약의 세력을 변혁시켜야 한다.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 복음과 문화의 관계만큼 중요한 주제도 없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과 여러 문화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현대 선교학에서 아주 왕성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타 문화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것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선교에 있어서 문화연구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지고 있다.

그 중요성을 학자들은 문화연구가 선교사역에 도구가 된다는 것에서 발견한다. 선교학자들은 문화인류학이 선교에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Grunlan and Mayers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문화인류학의 연구를 통해 문화가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알게 되고 그래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둘째, 문화인류학이 선교사들에게 주는 실제적인 유익을 언급하는데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주는 것, 문화충격을 완화 및 문화의 적응을 극대화 시켜주는 것, 그리고 상황화 등을 말한다.

이러한 문화 인류학의 중요성을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문화 인류학은 선교사역에 중요한, 아니 필수적인 과목이 되었다. 이제는 문화인류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으면 타문화 선교훈련을 적절히 받았다고 인정되지 않을 정도이다(Hibert 9, 19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성경의 지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화에 대해서 부족한 반면에 다른 이들은 현대의 인간 사회와 문화에 강조점을 두어왔으나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신학적 기초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선교에 있어서 두 가지의 균형이 절실히 필요하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화)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얼마나 복음이 적실성(Relevance) 있게 들려지는가? 적실성이 없을 때는 복음이 이질적이며 공허하게 되고그것이 지나칠 때는 혼합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선교사가 새로운 선교현장에 사역하면서 직면하는 문제는 전통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인데 즉 새로운 회심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자기 삶의 일부였던 전통 문화 예를 들면 출생,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예술 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과 문화의 관계 즉 상황화의 세 가지 단계를 살펴 본다

 

 

 

옛것의 부인: 상황화의 거부

 

과거의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대부분의 옛 관습들이 이교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해버린 적이 많았다. 이러한 거부는 선교사의 자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 에 기인한 것으로, 선교사들은 복음을 자신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문화의 관습들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관습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문화적 진공상태를 만들어냈고 또한 서구적인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옛것의 수용: 무비판적 상황화

 

전통적인 관습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법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교회에 수용한 경우인데 이 경우는 옛 관습 및 문화들을 기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러한 관습 및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어한 이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 할 수 있는데 첫째, 이들은 죄에는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죄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 이것은 기독교가 혼합주의에 빠지는 위기에 직면할 수 도 있었다. 따라서 이것도 또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바 문제점은 그 관습과 문화가운데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죄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었다.

 

 

옛것에 선별적으로 대응함: 비판적 상황화

 

옛 방식에 대한 무비판적 거부와 무비판적 수용이 둘 다 선교사역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세 번째 접근법은 비판적 상황화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즉 옛 신념들과 관습들을 거부하거나 수용하기에 앞서 잘 점검해보며 선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세가운데서 두 가지 대응방식이 나타날 수 있는데 하나는 옛 전통과 문화가 비성경적이 아니라면 신자들은 그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고 옛 전통과 문화가 새로운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교사와 토착신자의 신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함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토착문화에 있어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변혁시켜 가는 비판적 상황화가 이루어져야한다. 이것이 복음과 문화에 있어서 가장 고려되어야 할 상황화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결론

이러한 복음과 문화의 조화인 상황화가 성경적으로 이루어질려면 복음과 문화를 균형있게 습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교현장에 적용할 때 끊임없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한다. 이유는 선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차이와 극복

 

낭만적 상태: 새로운 문화지에 처음 도착하면 여행과 이국적인 풍경의 낭만으로 인하여 흥분하곤 한다.

현실적 상태: 이곳이 이제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고향임을 인식하게 된다. 적응을 위해서 어려운 언어와 낯선 풍습을 배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자 낭만적으로 보이고 신나던 일들이 갑자기 이상하고 위협적인 일들로 변해버린다.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길 때 사람들은 핵심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문화차이에서 오는 문제이다.

 

문화차이

 

문화충격

어릴 때부터 배워온 모든 문화적 틀과 지침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할 때 경험하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말한다.

 

언어충격

새로운 문화권에서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충격은 의사소통의 불능

 

일상생활의 변화

새로운 문화권에서 첫해동안의 삶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한 갈등이 되곤 한다.

 

)의복: 인도인들은 여선교사의 복장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사회에서는 여자의 신체에서 가장 성적 자극을 주는 곳이 여자의 종아리 부분이다. 그러므로 점잖은 여인은 발목까지 사리를 입어야 하는데 여선교사들은 무릎높이의 치마를 입고 있다.

 

 

문화충격의 증상

 

스트레스의 발생

 

신체의 질병

 

 

심리적,영적 우울증

 

 

문화충격의 과정

 

관광객의 단계

 

각성

 

회복

 

유머

 

적응

문화 충격의 마지막 단계는 새로운 문화가 편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법

 

염려를 인정하라

문화충격을 최소화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우리의 염려를 인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라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것은 두렵고 괴로운 체험이지만 반대로 신나고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화는 참여함으로써 가장 잘 배울 수 있다.현지에 도착하기 전에 문화에 대하여 많이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현지인들의 생활에 동참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언어와 문화를 잘 배우는 것은 미래의 선교사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뢰를 쌓아가라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신임을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할 때에만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신뢰형성은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용납에서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진정한 것이어야 한다. 단지 우리가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만 관계를 맺어간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곧 알아채고 크게 분노하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교묘한 형태의 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용당했다고 느낀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라

문화충격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가능한 한 스트레스를 줄여가는 것이다.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라

스트레스를 줄이는 중요한 방법은 현실적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두 가지로 언급할 수 있는데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주한 활동을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여가를 누리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우선적인 사역대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할 때에 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일에 사용하실 수 있다. 무엇을 해하느냐 보다는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단기간에 소진되는 것을 피하고 평생 동안 사역할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둘째, 이는 외국에서는 결코 이전과 동일한 수준의 업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심각하지 말라

스스로를 모든 활동의 중심인물로 보고 현재를 가장 중요한 시점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심각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매순간을 커다란 긴장으로 채우게 된다. 현재의 일들을 평생의 사역을 내다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유머, 융통성, 용서 및 감사들이 필요하다.

 

자신을 즐겁게 하라

 

부담을 나누라

 

문화충격을 넘어서:

 

 

 

현지인에 대한 선교사적 태도: 알리샤 이완스카(Alicja Iwanska 1978, 701-702)는 미국 서북부 거주민들의 삶을 분석하면서 타문화권 태도와 관계의 핵심을 잘 지적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세 개의 커다란 경험권으로 나눈다. 첫째는 주변상황이다. 여기에는 자연, 기후, 통치조직, 스포츠 그리고 그들이 그이 조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속한다. 두 번째 영역은 기계류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작업이나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포함된다. 도구는 수리가 가능하고 필요할 때까지 간직하지만 그 후에는 버리는 물건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일을 하는데 사용되는 물건이다. 이것들은 소유물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사람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관계를 형성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돌보아는 주는 것은 사람들이다.

 

이완스키의 연구에서 그녀가 연구한 집단은 모든 사람을 사람의 영역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 즉 미국 인디언 같은 사람들을 주변상황으로 간주한다. 동물원에 가는 것과 같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구경을 간다. 더욱이 멕시코 이민자들과 같은 노동자는 기계류로 본다. 그래서 생산성에 따라 그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더 이상 유익하지 않으면 낡은 도구처럼 버린다. 이 미국인들이 진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친척과 친구들뿐이다.

 

이것을 선교사역에 적용한다면 선교사는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문화를 주변 환경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비서나 간호원, 하인들처럼 우리를 위해 일해 주는 사람들을 도구로 보는 경향도 있다. 참다운 선교에 있어야 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즉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장애물을 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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