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역사
몽골은 칭기스칸으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워 비로소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원나라(1279~1368년)는 순제를 마지막으로 1368년 한민족계인 명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몽골은 고비 사막 너머로 쫓겨가서 13세기의 모습을 갖춘 채 신비한 고립국가로 나마게 되었으며 이후 1616년에 성립한 만주 계의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아 버리고 몽골인들은 황폐한 초원지대로 밀려나 유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고착되었다. 1911년 한민족 계의 사람들이 청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을 때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외몽골은 원래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외몽골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의 혁명으로 힘을 쓰지 못하자 중국이 침공을 시작하였고, 결국 외몽골은 독립을 취소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도 침입해와서 라마교의 활불(달라이 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외몽골은 러시아 혁명 세력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과 맞서 싸워 1921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날이 7월 11일로 현재의 독립 기념일(나담)이 되었다.
1924년 11월에는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도릭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39년 이후에는 일본과의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 측에서 러시아와 함께 싸워 승리하였다. 1961년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중ㆍ몽 국경이 확정되어 내ㆍ외 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서 1984년까지 몽골의 정치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52년까지 제1기는 쵸이발산이 집권한 시기로서 정치적, 종교적인 대숙청을 통해 몽골 인민혁명당의 집권을 강화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몽골은 쵸이발산의 통치하에 중앙집권적 국가로써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과거 전통적인 라마불교의 종교세력은 대대적인 붕괴가 있었다. 제2기는 체덴발의 통치기간이다. 1952년에 당의 지도자가 된 체덴발은 중앙집권적 국가 통제경제 골격을 확립하였으며, 1974년에는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61년 UN에 가입하고, 1965년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 후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비공산 서방 국가들과도 정식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9년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련군이 몽골 내로 진주하였고, 이것인 계기가 되어 1970년대이후에 소련과의 관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1984년 8월 체덴발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12월 바트뭉흐가 이끄는 온건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바트뭉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보조를 맞추어 위로부터의 개혁인 시네치엘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개혁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급기야 1989년 12월 몽골민주연맹의 주도하에 아시아 공산국가에서는 최초로 민주화 가두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몽골민주연맹 DMU은 학생, 종교인, 예술인,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재야 세력으로, 지금까지 몽골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1990년 1월 14일 이들은 울란바토르에서 체덴발의 재판회부 요구와 그들을 지배했던 공산 이데올로기의 전면 부정, 스탈린식의 정치제도와 집권 인민혁명당의 독재체제를 비난하는 시위를 시작하여, 4일후에는 스탈인 동상을 철거하였다. 1월 20일에는 정부가 개혁단체인 DMU를 인정, 공산당 일당 독재포기를 시사하였고, 지방 당직의 경선제 도입, 연내 개헌 착수, 자유총선 실시 등 잇따른 정책 변화를 발표함으로써 몽골 민주화 시위데 대한 굴복의 뜻을 나타냈다. 바트뭉흐는 탱크와 구대로 진압하자는 건의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는 북경의 천안문 광장의 대학살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였다. 같은 해 2월 18일 몽골민주연맹을 주축으로 한 몽골 최초의 야당인 몽골민주당 DMP가 창설되었고, 3월 12일 몽골 정치국원 전원 사퇴에 따라 공산당 권력 독점이 막을 내렸으며, 3월 15일 바트뭉흐 서기장의 사임으로 몽골의 민주화 시위는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1992년 1월 몽골인민대회에서 사회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중립, 비동맹,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할 것을 선언하였고, 국명을 몽골인민공화국(Mongolian People's Republic)에서 몽골(Mongolia)로 변경하였다.
몽골의 종교
헌법은 몽골의 주요 종교로 불교, 무속, 이슬람교를 인정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어떤 종교이든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자유는 허용하고 있다. 국가가 안전에 위혐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될 경우, 외국 종교로 규정하여 제한하고 있다.
*샤머니즘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확장에 따라 제국 내에는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고등종교들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체계화된 교리를 가지고 있지 dskg은 샤먼 신앙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열세에 빠져 겨우 민간 신앙으로서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고, 1570년대 티벳의 불교가 들어온 이후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불교
불교는 1570년대 몽골로 진입한 이후 샤먼 신앙을 밀어내고 몽골의 국교로 자리잡았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를 ‘라마교’라는 고유 명사로 부르지만 정작 몽골과 티베트 사람은 불교라는 단어만 알지 라마교라는 단어는 알지 못한다.
라마 불교는 몽골이 제국으로서의 세력을 거의 상실하고, 중국(명, 청 등)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부터 몽골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사회에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실질적인 정치 세력화 하였다. 그러나 라마 불교는 여러 가지 폐해를 가져왔다. 라마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으로 인해 한 때 남자 인구의 40%가 라마승이었고 이로 인해 인구 감소가 초래되었다. 정권과 밀착되어 정권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고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공산 혁명 당시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사회주의 문화 혁명이 지속되던 193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사찰이 폐쇄되었고 승려들이 구속되거나, 사찰에서 나와 일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몽골의 라마 불교는 티벳 형 불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전이 몽골어로 번역되지 못했고, 간단한 입문서 정도만이 소개될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라마법회는 티벳어로 진행되며, 참석한 대중들은 거의 그 의미들을 모른 채 예식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서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마 승려에 대한 존경은 깊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라마승려에게 물어보게 되고, 심한 경우는 이사하는 날, 결혼하는 날 등을 라마승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회교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 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흐 시에도 회교도들이 4~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현재 몽골 안에 모슬렘 교도를 위한 회교 집회소는 약 5개로 추산하고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 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모슬렘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따라서 모슬렘의 확산을 막고, 개방적인 모슬렘 선교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몽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종교 |
인구비율 |
신자 |
성장률 |
무종교/기타 |
41.59% |
1,107,134 |
+1.3% |
샤머니즘 |
31.20% |
830,550 |
+1.6% |
불교 |
22.50% |
598,955 |
+2.0% |
이슬람교 |
4.0% |
106,481 |
+2.7% |
기독교 |
0.71% |
18,000 |
+15.2% |
[몽골종교현황] <세계기도정보2002>
몽골의 기독교 선교 역사
*근대 이전의 기독교 선교 역사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이미 7세기경에 몽고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경교(Nestorian)에 의한 선교일 것이다. 송나라가 기독교를 자신들이 싫어하는 몽골의 종교라고 간주해서 박해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가 끊어진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확실한 것은 12세기경 고비 사막 북쪽(오늘의 어워르항가이 아이막 근처)에 살던 몽골족 케라이트 부족에 대한 선교이다. 칭기스칸이 세력 확대 과정에서 이 부족과 결탁했다가 나중에 그 부족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을 자신의 수도로 빼앗았는데 당시 그곳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하는 역사 기록이 있다. 실제로 당시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교회의 터로 보이는 돌로 된 십자가가 남아 있다. 또 원나라 왕실의 와비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한다. 루이 9세와 교황의 친서를 휴대하고 1253년 하라호름을 방문한 루브룩은 당시 몽골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여러채의 궁전 이외에도 열 두 개의 사원이 들어서 있었고, 이 가운데 두 채는 모스크였고 한 채는 교회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칭기스칸 자신은 기독교에 무관심했으나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스트븐 니일은 “모든 종교는 존중되어야 하며 사제들과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몽골족은 자신들의 세계 제패의 첫 번째 장애로 회교 세력을 꼽았고, 서방 카톨릭 세력과 연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246년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서한을 가지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조반니가 첫 번째 사절로 몽골에 도착하였다. 이후 두 번 더 교황의 사절이 몽골에 도착하였고, 몽골 황실과 기독교 교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실제적인 성과는 없었다.
칭기스칸의 며느리 중 하나가 기독교인이었고 그녀에게서 쿠빌라이 칸이 태어났다. 쿠빌라이 칸이 기독교인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그의 두 형제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원라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정신적인 통일 세력을 필요로 했고 기존의 샤머니즘이이 일을 감당할 수 없자, 세계 고등종교 가운데 새로운 국가 종교를 선택하려고 하였다. 그는 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불교, 회교, 유교, 도교 등 5대 종교를 면밀히 연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중기독교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당시 로마 교황에게 잘 준비된 유능한 선교사 100명을 보내주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삼겠다는 편지를 1276년부터 1291년까지 원나라에 체류한 마르코폴로를 통하여 보냈으나 교황은 당시 100년 전쟁 등 유럽의 복잡한 사정을 핑계로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20년이 경과한 1289년에야 교황 니콜라스 4세가 사절을 겨우 2명 보냈는데, 한 명은 도중에 죽고 말았다. 결국 원제국은 불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중국과 아시아 선교의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1305년까지 로마 카톨릭(도미니크 및 프란시스코 수도사)은 한 때 6,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고 몬테코르의 존은 보고하였다. 1335년에 32명의 선교사가 북경에 도착하여 활동을 벌였고, 이 무렵 프란체스코회의 소규모 선교회에서는 유목민들을 따라 함께 이동하면서 “움직이는 수도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는 보고가 있다.
1362년 마지막 감독이었던 플로렌스의 제임스가 몽골족이 북겨에서 축출당할 때 순교하였으며, 1369년 라틴교회는 북경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원나라 몰락 후 약 500년간 기독교 전파의 기회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 대해 적대적인 중국은 기독교를 몽골의 종교로 간주하여 기독교 선교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로써 몽골 자체의 선교는 물론 아시아 전체의 기독교 선교가 사실상 차단되었다.
1600년대에 와서 우랄산맥의 동남쪽 고원지대에 사는 몽골족의 일파인 칼묵크(Kalmucks)족에게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근대이후의 몽골 기독교선교 역사
근대선교는 1817년 스웨덴선교사 코르넬리우스 람과 영국선교사 부부 스타리브라스가 효시를 이루었다.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인 제임스 길모어로 그는 1870년 몽골에 도착하여 12년간 몽골 유목민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 결과를 평가하면서, 서구 선교사보다 중국인 선교사가 실제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면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수명의 중국인 선교사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0년경 위화단 사건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가 일어나 선교활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1815년 슈미트 박사가 칼무크 방언으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 후 브리야트 방언으로 성경 전체가 번역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경 번역 사업이 진행되었다.
*몽골의 현대의 선교 역사
1919년경 다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1924년 사회주의국가 설립으로 인해 모든 선교 활동이 중단되었다. 사회주의정책 아래에서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박해를 받았는데, 기독교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더욱 극심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1989년까지 단 한명의 기독교인도 없었고, 선교활동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몽골정부가 1989년 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자본주의국가의 외국인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되었고, 선교활동이 재개되었다.
오랜 선교의 공백기를 지나 1980년대 말 몽골정부의 개방화정책 이후, 가장 현저한 선교활동을 펼친 사람은 죤 기븐스이다. 그는 1972년에 몽골국립종합대학에 유학생의 신분으로 입국하여 몽골어를 배웠고, 일시 귀국했다가 1978년에 복학하여 몽골인 아내 알타를 만났다. 1980년에 불법 종교활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987년에 영국에서 알타와 결혼하였다. 그 후 개방조치가 이뤄지자 몽골에 다시 들어와 1990년 약 50명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경(선게레)을 그의 아내 알타와 함께 번약, 출판하였다. 이후 몽골성서공회(MBS)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최초의 교회인 그리스도교회를 개척하였고, 지방전도에도 열심을 가지고 일하였다.
1990년 이후 몽골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은 아래의 사역들을 들 수 있다.
1990 : 홍콩에서 몽골선교를 위한 Confererance 개최(Inter-Dev) 그리스도교회 설립,
최초 기독교 단체 ISS 정부등록, 신약발간(MBS)
1991 : 몽골성서공회(MBS) 설립, Jesus Film 사역 시작, 사랑의 쌀 1천톤 몽골도착
1992 : 선교사들 인터네셔날 스쿨 개교, 다니엘 램 프로그램(교회지도자 훈련)시작
1993 : 교회학교연합회 활동 시작, 종교법 발표
1994 : 연세친선병원 개원, 교회등록시작
1995 : 연합성경훈련원(UBTC) 개교, 제1차 한인선교사대회(수련회)
1996 : 신약발간(MBTC), Eagle T.V. 개국(CNN몽골출장소)
1997 : 연합성경훈련원(UBTC) 1회 졸업식&신학부 과정 시작
1998 : 올란바타르 선교사자녀학교 개교
1999 : 몽골복음주의협의회(MEA)출범&정부 등록, UBTC 신학부 1회 졸업(7명)
몽골찬송협의회 찬송가 발간
2000 : 신구약성경 완전 번역 발간
2002 : 최초의 연합목사 안수식(27명)
2003 : 세계침례교연맹 회장 김장환 목사 집회, 대규모 수도와 지방 치유집회
2004 : 조용기목사 집회
*몽골 국민의 기독교 인지도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몽골 교회 성도들의 전도와 Eagle TV의 개국, 예수 영화 상영, 지방 전도 등의 영향으로 현재 많은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수도인 올란바타르를 비롯한 다르항, 에르뜨네트 등 3개 도시는 여타 다른 지역보다 기독교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역하고 있으며,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 개발, 구호, 교육, 의료 등의 사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외국의 종교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과거 공산주의 교육을 통한 무신론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서구 식민주의, 제국주의 앞잡이이며 종교는 인민을 미혹하는 도구라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나이든 장년층과 사회지도층 인사 가운데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 일부에서는 물질을 앞세워 젊은이들 호도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여러 차례 발표된 저도 있으며, 몽골같이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 국민들이 여러 가지 종교를 믿으면 일부 국가에서와 같이 종교분쟁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ㅣ 하여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1995년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과 개방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외국어를 배우려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을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은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좀 더 객관적으로 종교현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대도시에서 열린 대형 집회를 통하여 기독교가 많이 소개되었고,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일하고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 몽골인들은 외국에서 교회에 다녀보았거나 기독교를 배우고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므로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몰몬교, 위트니스 지방교회, 통일교, 바하이교 등 다양한 종파와 이단과 기독교를 거의 구분하고 있지 못하며 단지 외래 종교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호기심으로 나오는 사람이 많으며 각 교회들마다 매주 새로 오는 신자가 많으나 교회에 남아 계속해서 신앙 생활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몽골의 기독교 성장 추세
교회 수나 기독교인이 1991년에서 1994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다가 1995년부터 약3년여 조금 완만히 진행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1997년부터 다시 기독교의 성장이 큰 탄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특별히 1998년에서 2000년 사이 2년 동안 몽골의 기독교는 70% 성장하였으며, 2000년에서 2004년 사이에는 74% 성장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최근 6년간 몽골의 기독교는 세 배 정도 성장하였으며, 6년 동안 연평균 기독교 성장률ㅇㄴ 50%에 이른다
년도 |
~90 |
90 |
91 |
92 |
93 |
94 |
96 |
97 |
98 |
2000 |
2004 |
교인수 |
0 |
30 |
50 |
1,500 |
2,500 |
3,300 |
4,000 |
5,400 |
7,260 |
12,373 |
21,588 |
교회수 |
0 |
1 |
2 |
13 |
26 |
42 |
56 |
64 |
77 |
132 |
220 |
(단위 : 명, 개)
[연도별 기독교 성장 추세](몽골선교자료집2004)
NO |
구이름 |
전체사원수 |
허가 |
무허가 |
불교 |
기독교 |
바하이 |
무속 |
프로테스탄트 |
카톨릭 |
1 |
수하바타르 |
21 |
14 |
7 |
5 |
14 |
1 |
1 |
|
|
2 |
바양주르흐 |
36 |
26 |
10 |
12 |
15 |
|
1 |
2 |
2 |
3 |
항올 |
10 |
8 |
2 |
4 |
5 |
|
|
|
1 |
4 |
송긴하이르항 |
23 |
16 |
7 |
7 |
16 |
|
|
|
|
5 |
바양골 |
16 |
11 |
5 |
11 |
3 |
|
1 |
|
|
6 |
칭겔테 |
15 |
10 |
5 |
5 |
10 |
|
|
|
|
7 |
바가노르 |
3 |
3 |
0 |
1 |
2 |
|
|
|
|
8 |
박항가이 |
|
|
|
|
|
|
|
|
|
9 |
날아이흐 |
5 |
3 |
2 |
1 |
2 |
|
|
|
|
계 |
129 |
91 |
38 |
46 |
67 |
1 |
3 |
2 |
3 |
[울란바타르시 의회가 밝힌 종교 단체 사원 숫자](어너뜨러 2005.3.23)
위의 조사는 등록을 받았거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서 시의회에서 파악이 가능한 교회, 사원들을 중심으로 조사된 것임.
*몽골선교의 한국선교사 장점
한국인 선교사들은 몽골 사역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독특한 장점이 있다.
첫째, 한국과 몽골 사이에 최근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몽골 정부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여 아시아의 제5의 용이 되고자 하여 한국을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으며 몽골 외교에 있어서 원조해 주는 6대 우방 국가(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한국)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둘째, 몽골과 한국은 문화, 인종, 역사, 풍습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 형제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등 기본적인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택시도 타도 처음엔 중국사람으로 오해하고 퉁명하게 대하다가도 한국 사람이라고 국적을 밝히면 반가와 하는 편이다.
셋째, 언어가 같은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문법과 어순이 유사하여, 쉽게 익힐 수 있다. 따라서 열심히 1년만 하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간단한 강의는 준비를 하면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서구 선교사는 약 3년 이상 걸리며 그 경우에도 원활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다.
넷째, 몽골인은 자존심이 강해 외국인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은 외모나 생활 습관 등의 유사성으로 인해 거부감 없이 접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다섯째, 역사적으로 한국은 몽골에 의해 침략을 당한 과거가 있고, 몽골에 대해 피해를 입히거나 나쁜 관계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몽골인들에게 접근할 때에 정치적, 역사적 장애가 별로 없다.
한국선교사들에게 이러한 유리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농경사회와 몽골의 유목사회의 배경은 너무나 다르다. 더구나 몽골은 70년간 러시아의 지배적인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유럽식의 사고와 문화가 배어 있다. 이러한 면을 면밀히 감안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종교와 이단종파의 활동현황
2004년 몽골 연합신학교 학생들이 몽골에서 이단들의 현주소에 대해 조사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단들의 현주소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ㆍ카톨릭
1992년 7월 바티칸 카톨릭교회 대표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정부외교 채널을 통해 활동 반경을 넓혀 가고 있는데 구호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울란바타르시에 4개(카톨릭교회 대표부, 성 베드로 바울교회, 성모마리아교회, 선한목자교회)의 교회가 있다.
구호, 구제기관의 활동으로는 “Verbist”어린이 보호, 양육 센타, “돈 보스꼬”직업 교육센타, “몬테소리” 교육을 하는 구제 유치원, “보양트 하이르항” 연합, 오르흥 아이막의 “미니 게르” 구제 유치원, 바양호쇼의 게르 지역의 가정들에게 상수도와 하수도 배관을 시설하는 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시골에는 교회가 없으며, 가난한 가정에 가축을 제공하거나 구제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 이탈리아, 필리핀 등의 나라에서 7년 기간으로 몽골 사제를 준비하기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현재 몽골에는 700~800명의 카톨릭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35명 정도의 외국에서 온 신부, 수녀, 수사가 몽골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ㆍ회교
회교는 이슬람 선교의 중요한 전략적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는 터키와 몽골로 회교 선교사를 계속 보내고 있으며, 재정적 지원도 탄탄하다. 학교를 통한 어린이, 대학생전도와 카자흐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지원 및 회교사원건립 노력 등이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해지고 있다. 다르항에 모임이 생겼고, 날라이흐에는 교회와 사원이 불과 100m 거리 안에 나란히 있어 영적인 대결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회교 선교사는 11년째 일하고 있으며,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외교적인 경로를 통해 회교 선교사의 활동을 추구하고 있다. 현재 몽골모슬렘협회가 조직되어 있다. 최근 울란바타르 시내 바양골 구에 회교사원 건축공사가 계획 중이다. 현재 설계도 작성을 마치고 건축허가를 받은 상황이다.
울란바타르시 중심부에서 멀지 않고,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살고 있는 올란바타르역 부근에 문화회관 명목으로 세워진 모스크는 한꺼번에 800명 이상이 들어가는 대형 예배실을 갖추고, 어쩌면 이슬람의 위용을 몽골에 드러내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ㆍ안식교
1991년 필리핀 마닐라 소재 동남아시아 지부에서 몽골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ADRA(안숙교의 구제 구호 NGO)를 통하여 빈곤층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몽골에 들어왔다.
1994년 공식적인 안식교회의 활동이 시작되어 몽골의 안식교회 기관을 설립하였으며, 현재의 대표이자 몽골 안식교의 2대 대표인 미국인 델, 토넬이 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몽골에 7개의 교회가 있으며, 600여 명의 신자가 있다. 울란바트안에 5개 교회(울란바타르교회, 톨고이트교회, 덜러다흐부레교회, 가이함식크트하이르교회)가 있다.
200여 명의 신자가 모이는 가장 큰 교회인 울란바타르 교회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 자료를 준비하여 괌에 있는 “안식교의 목소리”라는 방송센터로 보내면 그곳에서 전 세계로 그리고 몽골로 몽골어로 된 단파방송을 1주일에 2번씩 하고 있다.
ㆍ몰몬교
1992년에 J.Brough 장로, 1993년에 Neal A. Maxwell 장로가 들어와서 몰몬교를 시작하였다. 1993년에 몽골인 푸릅수릉, 바트얼찌이 2명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고, 1997년 최초의 몰몬교회가 세워졌다.
몰몬교의 선교센타는 항올에 있으며 이 센터는 몽골인 가운데 최초의 설교자가 된 소욜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대표이다. 95년에 16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97년에는 34명이었지만 현재 몽골에는 약 6,000여 명의 몰몬교도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올란바타르에 13개, 지방에 11개 지역에 몰몬교회가 있다.
ㆍ통일교
일본 사람들의 대규모 자본 투자를 약속하며 몽골에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립 외국어 대학을 중심으로 10명의 일본인 통일교 선교사가 일본어 교수로 일하고 있다. 매주 100명 정도 구 레닌박물관 뒤편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있으며 몽골의 대표는 한국인이다.
ㆍ여호와의 증인
1999년에 러시아를 통해 몽골에 들어와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울란바타르에 1개 교회에 상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다르항에 2개의 소그룹 모임이 있다. 1999년에 28명으로 시작하여 현재 450~530명의 신자가 몽골에 있다. 몽골의 대표는 산지딩 오융바트라는 중년의 남자이며, 5명으로 구성된 지도자 그룹이 있고, 이 그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울란바타르에 있는 모임은 오융바트가 인도하고 있고 8명의 장로가 돕고 있으며, 매 주일 오후 3시에 모임이 있다. 현재 찬양은 몽골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일본, 러시아, 영어로 부른다.
여호와의 증인 교회는 일본, 러시아, 한국, 우크라이나, 미국, 호주 등의 나라에서 재정, 물품, 세미나 강사 파송 등의 도움을 받고 있다.
ㆍ위트니스
지방교회(위트니스)는 1991년에 한국에서 온 김영수를 통해 시작도어 한때 200명 가량 모였는데, 김영수가 베트남으로 사역지를 바꾼 이후 약간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1993년 가을, 두 명의 몽골 청년을 한국으로 데려가 훈련을 시켰는데, 이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지방교회와 더불어 기독교와 한국 사람들이 함께 신문을 통해 공격받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기존 기독교회의 교인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현지인을 세워서 적극적으로 세력확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현재 모이는 인원은 수도에는 100~150명가량 되며 주로 가정교회 형태로 모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지방에서는 매우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모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방 전도를 하려는 팀과 종종 마찰을 빚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방교회(몽골에서는 위트니스 모임으로 알려져 있음)의 시골 전도를 매우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신약성경(신게레)을 번역하였고, 개정역(Recovery Version)과 함께 영ㆍ몽 대조 판을 1993년에 6000부 가량 발간하였고, 자체 인쇄소를 갖추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ㆍ바하이교
바아히교와 기타 이단들은 4~5년 전부터 활동을 했는데, 최근 공개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외국어대학의 외국인 영어교수 부부가 바하이교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자신들의 교주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바하이교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신사도교회(New Apostle Church)등의 소수 이단들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들어온 이단들이 몽골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초석계열의 선교사가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으며, 김기동의 귀신론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가 공공연히 활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고 한다. 또 레마선교회에서도 일부 대학생들을 한국으로 보내어 연수를 받게 하여 따르게 하는 등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일파에서 파송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대표 목사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라고 까지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어 몽골 교회와 선교사들의 경계가 요구된다.
몽고선교 현실과 과제
ㆍ몽골선교의 최근 상황
최근 몽골의 선교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들과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교단설립이 표면화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몽골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이루고자총력을 경주하였다. 그래서 신학교도 연합신학교를 세워서, 동서양 선교사들과 몽골 지도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교단이 몽골 선교를 시작하면서 교단성격을 분명히 나타내었고, 침례교와 감리교에서도 각각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세워서 교단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명칭에도 침례교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루터교회에서 교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점차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보수적인 몇몇 장로 교단들도 힘을 모아서 장로교단 설립을 추진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단 형성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며, 몽골에 연합된 기독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교단선교부와 선교단체도 있으며, 몽골교회의 지도자들은 교단의 필요성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본격적인 대형집회가 진행되고 있다.
2003년 여름 대규모 치유집회와 전도집회가 열렸다. 헬프인터내셔날에서 주최한 “변화와 치유”집회에는 아프리카에서 강사가 초청되었으며, 울란바타르와 다르항, 에르뜨네트에서 수 만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세계침례교회의 대표인 김장환 목사의 집회에도 3만명 이상이 모여 나담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2004년 여름에도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집회가 있었다.
지금까지 몽골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대형집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거나 신중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점점 대형집회들을 열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셋째, 몽골인들의 지도력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몽골복음주의연맹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으며, 이는 몽골 현지인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실체로 인정되어지고 있다. 몽골복음주의연맹에 의하면, 여기에는 현재 150여 교회와 30여개의 단체들이 소속되어 있다. 작년에 있다. 작년에 있었던 두 대형집회도 몽골복음주의연맹의 주도하에 치루어졌으며, 현지인들의 리더쉽이 점차 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합신학교에서도 싱가포르, 호주, 독일 등지에서 공부하고 온 몽골인 교수들이 활발하게 교수 사역을 펼치고 있다.
넷째, 교육선교 사역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 교육선교 사역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대학인 3개나 되며, 몽골의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10년 역사를 가진 울란바타르대학이 점차 발전하여 몽골의 사립대학들 중 선두 주자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영어로 강의를 하여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실력있는 지도자를 키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몽골국제대학교가 개교하였으며, 정보화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역군들을 배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후레정보통신대학이 세워졌다.
1997년에 세워진 울란바타르 선교사자녀학교도 점차 성장, 발전하고 있으며, 길거리를 방황하는 빈민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세워진 밝은 미래학교에서도 좋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직업 교육을 하고 교회와 문화센터 사역을 통하여 한국과 영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다섯째, 몽골 지도자들과의 연합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몽골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점차 성장하면서 일부 몽골 지도자들과 한국 선교사들 간에 의견 불일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몽골인 지도자들과 한국 선교사들 간의 문화적, 사역적 방법과 경험, 철학의 차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하여야 할 때이다.
여섯째, 지방사역의 점차 확대되고 있다.
올란바타르에는 현재 교회가 없는 지역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거의 모든 구마다, 동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어떤 동에는 교회가 서너개 있는 지역까지 있다. 그리고 특별행정구역이며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다르항과 에르뜨네트에도 교회가 발전하고 있으며, 둘란바타르를 둘러싸고 있는 터브 아이막(중앙 도)에도 거의 모든 군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몽골선교는 올란바타르, 다르항, 에르뜨네트와 터브 아이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지방 사역을 펼쳐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하국선교사들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사역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새롭게 몽골로 들어오는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처음부터 지방 사역을 진지하게 계획하고 들어오는 선교사들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일곱째, 디아스포라 사역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몽골의 가장 큰 문제는 실업, 가난, 알콜 중독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많은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고, 설령 직장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임금 수준이 낮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 일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몽골인들에게 있어서 미국, 한국, 일본, 대만 등은 기회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1만7천명 이상의 몽골인들이 있으며,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교회를 통한 도움을 받고 있으며, 몽골의 복음화율을 몇 배나 뛰어넘는 수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 일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몽골인들을 돌보는 일도 중요한 사역으로 대두되고 있다. 현재 울란바타르에는 한국에서 일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나 모임이 대여섯개나 되면, 세계에 흩어진 몽골인들을 복음화하는 일은 몽골선교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여덟째, 전문인 선교사 사역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몽골 선교의 특징은 처음부터 전문인 선교사의 사역이 활발하였다는 것이다. 몽골은 선교적으로 창의적 접근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목회자 선교사 뿐 만아니라 전문인 선교사들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다. 몽골선교 초창기부터 의료, 교육, 체육, 농업, 지역사회개발 및 문화사역 등 전문인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지금도 점차 확대되고 구체화되고 있다. 의료 사역으로는 연세친선병원, 에바다치과병원 등을 들 수 있으며, 교육사역으로는 앞에서 울란바타르대학교, 몽골국제대학교, 후레정보통신대학교, 밝은 미래학교 등을 들 수 있으며, 탁구와 태권도 및 농업 사역도 여러 단체에서 펼치고 있다.
아홉째, 신구약 성경이 완전 번역되었고, 현재 수정판이 나왔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섭리로 몽골선교역사 10년이 채 되지 않은 2000년 여름에 신구약 성경이 모두 몽골어로 번역되어 “아리옹 비블”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몽골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이 성장하며 은혜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위클리프 등의 전문적인 성경번역단체의 검증을 받지 않았고, 번역과 편집에 적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몽골선교 초창기 존기븐스가 번역한 성경과의 관계 등의 문제로 다소 마찰이 있었다. 그래서 “아리옹 비블”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기관, 교회, 단체들이 모여서 성경을 수정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내용을 수정하지는 않고, 오자나 분명한 오역이 있는 부분 등을 수정하여서 2005년 초에 수정판이 출판되었다.
ㆍ몽골선교의 과제
향후 몽골선교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합의 지속의 과제이다.
몽골선교의 가장 큰 자랑은 연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사역보다도 전체적인 몽골선교와 연합을 중요시 해왔다. 현재 몽골은 교단설립과 몽골인 지도력의 성장으로 인한 선교사와의 적절한 관계설정, 사역의 이양, 목사 안수 등 언제든지 연합을 깨뜨릴 수 있는 민감한 문제들이 산적해 왔다. 특히 교단설립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기독교 교단을 설립하겠다는 초창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가는 이상적인 연합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단이나 신학 등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한 상황에서 기독교 총연합회 등과 같은 방법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연합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잘 이루어져왔던 연합의 분위기를 어떻게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며 구체화시킬 것인가가 몽골 선교의 미래의 중용의 과제이다.
둘째, 지도력 이양의 과제이다.
몽골인들의 지도력이 점점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도력 이양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현지인 지도력 이양에 있어서는 교단이나 선교 단체, 선교사 개인의 시각과 사역 철학, 개 교회의 지역적 상황과 교인 인적 자원 구성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력을 이야하였지만 잘 정착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 교회들이 있으며, 지도력 이양 이후 자립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교회들도 있다. 또 지도력을 이양할 시기를 놓친 경우는 교회가 분립되어 나가거나, 선교사가 이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곳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현지인 지도력 이양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양육하여, 점차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력을 이양하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셋째, 효과적인 지방 사역을 위한 연합이다.
몽골의 교회 상황에 대해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방 사역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울란바타르시의 복음화율은 2% 정도에 이를 정도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방에는 복음화율이 극히 미미한 지역이 많다. 몽골 복음화는 이제 올란바타르에서 점점 지방으로 확대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앞서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지방의 일부 교회는 세워진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소수가 모이고, 변변한 건물도 없으며, 안정된 사역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지방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지역 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소수 집단이 되고 있다.
지방 사역을 위하여 효과적이고 연합하여 전략을 세우고, 지방에 교회를 세울 경우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넷째, 기독교 문화가 형성하는 과제이다.
몽골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이제 14년이 되었고, 몽골의 기독교가 점차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몽골의 교회는 기독교인의 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그 문화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몽골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성경적으로 재해석하여 발전시킬 것은 발전시키고, 변화시킬 부분은 변화시켜야 한다. 아직 몽골의 기독교는 선교 초창기적 혼합주의 현상이 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기독교인답게 산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의 결혼 문화, 장례 문화, 가정 문화 등 생활 문화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하고, 예술과 음악, 연예 등의 분야에서도 실력있는 기독교인들을 양성하여야 할 때이다.
다섯째, 문서 출판 사역의 과제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문서 사역에 구체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 TEE에서 수 십권의 성경공부교재와 신학교재가 번역 출판되었으며, 금년에는 단권이지만 간략한 신약 주석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연합신학교에서도 출판번역부가 있어서 신학교재, 용어 사전 등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성서유니온에서 몇 년전부터 “매일 성경”등과 같은 큐티 교재를 발행하여 성도들이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최근 몇 년동안 몽골어로 된 설교집, 예식집, 기독교 양서, 성경공부교재 등을 집필하고, 번역 출판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알리고 소개하고 양서들,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책들,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위한 사역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 출판되어야 몽골의 기독교가 더욱 든든한 기초를 형성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
여섯째, 기독교 용어와 제도, 예전 등의 제정 과제이다.
몽골은 아직 기독교 용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하나님의 명칭에 있어서도 크게 두 가지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두 가지 명칭 모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 교회, 자비 등의 기독교 용어에 대한 전문적이고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져 용어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직제나 예전에 대한 것도 통일된 내용이 없다. 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에 대한 자격과 기준, 안수 방법, 침례세례와 성찬의 집례 등에 대해서도 통일된 안이 없는 실정이며, 선교사나 지도자, 교회나 교단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부 혼선을 겪고 있다.
일곱째, 단기비전트립에 일부 혼선을 겪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몽골에 단기선교(비전트립)팀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여름에는 단기선교팀 때문에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며, 이제는 여름뿐만 아니라 연중 단기선교팀이 들어오고 있다. 연간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단기선교팀을 몽골선교 발전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배치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많은 자원이 소모되므로, 선교적으로 중요한 단기선교팀을 잘 활용하여야 한다. 일부 단기선교팀들은 자신들은 열심히 사역을 하고 갔다고 하는데, 몽골 선교의 큰 그림에서 보면, 이들은 도움을 주었다기 보다는 지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가 있다. 몽골의 선교적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현지 선교사들의 도움과 인도를 받지 않을 경우 많은 선교 자원이 비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오히려 선교를 막을 수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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