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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성경자료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by reviewer_life 201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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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

 

 

 

교회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할 때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파악합니다. 복음을 상품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은 복음의 가치에 대해 교회가 가진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마케팅의 침투는 철저하게 반비례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의 영업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갑'과 '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을'의 비애를 잘 알 것입니다. 영업은 어떻게 보면 을이 얼마나 갑을 효율적으로 감동시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상품의 강점은 부각시켜도 약점은 가능한 한 감춰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품을 최대한 단순 명료하게 만들어 팔아야 합니다. 상품이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지금 살펴본 영업 원리들을 복음에 적용하려는 순간 당장 부딪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 속에는 고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약점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고객에게 거부감을 주는 약점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가가 복음 판매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다행히 복음에는 조금만 손을 보면 고객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장점이 많습니다. 약점을 우선 철저히 제거한 후 복음 속에 숨겨진 장점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복음 판매를 위해 세우는 우선적인 전략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너는 죄인이다' 즉 '지금 너는 무엇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라는 메시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메시지를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복음을 상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가장 큰 장애물인 죄를 효과적으로 제거하자 죄와 함께 복음 상품의 약점으로 부각되었던 성경의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죄가 사라지자 우리의 죄를 짊어지러 오신 예수님도 사실상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까지 사라져버리면 기독교의 내용 자체가 너무 빈약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죄와 관련시키지 않은 채 계속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또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친한 친구처럼 우리 곁에서 위로해 주는 분으로 계속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간직하면 됩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자가 자기희생적 사랑의 상징으로 충분합니다.

고난과 핍박이라는 부정적 용어들 외에 성경 여러 곳에 영생, 평안, 범사에 잘 됨 등의 긍정적인 문구가 많이 등장합니다. 필요한 경우 요한삼서 1장 2절의 인사말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신학'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좋은 단어들을 넣어 그냥 복음으로 묶어 버리면 간단합니다. 축복의 하나님을 그냥 뭉뚱그려 복음 속에 포함시켜 버리면 됩니다. 아무튼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이 복음 속에 다 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됩니다.

아무리 마케팅을 중심으로 복음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전파하는 교회라도 이처럼 의도적으로 복음을 각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강조하고 싶은 몇몇 목회자들은 성경의 말씀과 모순되는 말까지 설교를 통해 내뱉는 위험한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상품의 좋은 것들만 소개하려는 열정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교리로 요약되는 기독교의 진리는 상품에 악영향을 주는 약점으로 인식되어 사라집니다.

또한 그 상품을 전달하는 설교 역시 길거나 따분하다면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약점이 제거된 복음을 바탕으로 세상이라는 '갑'을 향해 손을 내밀 강점들은 전능한 하나님을 통한 축복, 건강, 천국에의 보장, 사랑스러운 나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교회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감정의 배설입니다. 이러한 강점들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설교는 이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새 옷은 다름 아닌 새로운 설교 형태입니다. 또한 복음의 약점인 죄를 제거한 마케팅 교회에 죄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마케팅 교회 속에도 죄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가 하나님을 향한 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마케팅 교회에서 인식하는 죄는 바로 나를 향한 죄입니다. 마케팅 교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 그것은 바로 상대를 지겹게 하는 것입니다. 마케팅 교회에서 왜 교리가 사라집니까? 복잡한 교리는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지겹게 하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최대한 단순, 간편, 간단해야 한다는 철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교리입니다. 따라서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깊이 파는 강해 설교 등은 마케팅 교회의 적입니다. 마케팅 교회에는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새로운 죄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불쾌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얼마나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지, 당신 속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식의 설교가 강단에서 계속 퍼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케팅 교회는 용어 또한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 교회 안 나오는 사람으로 바뀌며, 진리라는 무거운 단어보다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합니다. 거룩한 삶보다는 행복한 삶을 더 선호합니다.

이제 설교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보다는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줄까에 치중하는 기능 경연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복음이 사람을 위한 상품이 되고 교회가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복음은 상품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우리는 죄로 완전히 죽은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심각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은 회개에 대한 것 이였습니다. 회개는 죄인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 왜 회개가 필요합니까? 죄인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교회에서 무슨 회개가 가능하겠습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 진노가 사라진 기독교 속에 무슨 구원이 필요합니까?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필요하고 무슨 십자가가 필요합니까? 그들에게 구원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삶의 개선이 필요할 뿐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케팅 교회 속에 진정한 의미의 예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께 내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이 우리가 사용해야 할 하나님으로 재정의 되었습니다. 오늘날 예배에서 점점 더 중요시 되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감정적인 고조 형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는"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해서 겉으로는 천사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이리의 발톱을 감춘 수많은 사상이 얼마나 무섭게 교회 속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이들을 이기는 길은 말씀대로 진리를 바로 "아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감정의 고조는 우리가 말씀을 깨달아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희열을 아는 사람은 그러한 희열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기독교의 교리임을 알게 됩니다. 교리가 상품을 복잡하게 만드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하는 본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고객의 입맛에 맞게 모든 약점이 제거된 상품으로 전락한 복음의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장은 바로 설교입니다. 성경본문이 설교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순간 나타나는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차고 넘치는 예화'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본문이 실종된 설교입니다.

이야기를 통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중요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하고 연관성 있는 이야기들을 설교에 많이 집어넣으면 당연히 설득의 효과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설교가 선포의 개념으로 이해될 때만이 설교는 하나님이 주권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의 설교는 많은 경우 교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전해집니다. 이런 설교 속에서의 예화는 진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감동을 위한 핵심수단으로 바뀝니다. 설교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설교가 이야기 모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진리를 지나친 예화가 성경본문 말씀을 단지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본문이 가진 원래의 의도 또는 의미에 대한 이해가 사라진 채 진행되는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성경 말씀은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장식물로 전락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상품화를 막으려면 개혁이 필요합니다. 성경말씀은 본문의 의미를 상실한 채 너무 자주 개인의 동기 부여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교회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입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아마도 면죄부를 발행한 교황일 것입니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중세 기독교의 타락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오로지 믿음으로' ,'오로지 성경으로'를 외치며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었습니다. 신앙이 상품화될 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면죄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모습으로 교회 속에서 복음을 상품화 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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