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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성경자료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by reviewer_life 201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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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

 

 

마케팅 교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복음의 능력의 회복이고, 둘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1. 복음의 능력 회복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현대인에게 단지 장식물의 일종에 불과한 십자가는 사실 초대교회 당시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는 가장 잔혹한 사형도구였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되어지고 혐오감과 수치심까지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복음은 1세기 사람들에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를 구원의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믿게 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가장 반실용적인 방법인 십자가를 구원의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십자가를 당연하게 거부하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를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 좋게 포장하여 사람들이 부담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마케팅교회는 실상 복음의 본래 의미를 변질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사도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담대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복음 속에는 다음과 같이 성도들이 부끄러워할만한 요소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복음은 표면적으로 로마 식민지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의 사형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둘째, 복음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 의지한 논쟁과 설득이 아닌 일방적인 선포의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셋째, 복음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거룩한 삶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어진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에는 거절과 비웃음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그것들을 극복할만한 큰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케팅 교회는 이 요소를 제거함으로 거부감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소는 단순히 부끄러워할만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요소를 제거한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상품의 가치는 지극히 현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상품으로 보는 마케팅 교회는 복음의 가치를 현실에 유용한 어떤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은 오늘날 나의 현실에 유용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가 복음이 주는 미래적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마케팅 기법은 바로 이러한 사탄의 전략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 속에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직시하며 이 땅에서의 안락보다는 장차 본향에 도착하여 누리게 될 더 큰 영광을 기대하며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단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합니다. 더 이상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 역시 성립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복음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인 된 모든 인간들에게 쏟아 부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피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으며,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마지막 때에 그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먼저 전해야 합니다.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인간의 구원의 서정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회심'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 회심에 대해 너무나도 피상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남발하기 때문에 마케팅 교회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오늘날 교회 속으로 침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케팅 교회의 가르침을 극복하려면 회심에 대한 바르고 구체적인 깨우침이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첫째, 회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이미 죽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를 위해 어떠한 역할도 담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죽은 존재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둘째, 회심은 단순히 격렬한 감정의 변화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합니다. 격렬한 감정의 변화에 의지하는 회심은 그 감정이 잠잠해진 후에는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섭니다.

셋째, 따라서 회심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넷째, 회심은 행동과 태도의 변화보다 마음 중심의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의 변화에 기반을 둔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섯째, 회심자 말씀의 진리를 사모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회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구원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의 완성에 대한 소망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는 초대교회 당시와는 좀 다른 의미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십자가를 향한 거부와 혐오, 조롱의 감정을 뛰어넘어 전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그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케팅 교회는 복음을 마치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당장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어떤 상품의 일종으로 전락시켜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은 절대 포장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거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포장된 십자가, 거부감을 제거한 복음을 사람들에게 판매한다면 설사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회심한 성도가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밖에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6) 복음 선포의 한 사례: 바울의 아테네 전도

우리는 바른 복음 선포의 모델을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바울 17장에 나타난 바울의 아테네 전도는 마케팅 교회에서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아테네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복음을 아테네인들에게 익숙한 철학으로 포장하여 전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철학적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테네인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로 접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세상의 지식에 대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마케팅 교회처럼 세상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법으로가 아닌 그 지식을 접촉점으로 삼고 그 지식을 진리인 양 붙들고 있는 세상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신문에 성경을 비추어 조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마케팅 열풍의 원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망각입니다. 마케팅 교회는 부담스런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담 없는 친근한 하나님으로 각색해놓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케팅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는 왜곡되고 기독교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실종되는 순간 우리의 예배는 예배일 수 없으며, 단지 사람들을 위한 쇼나 공연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배가 성립되는데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 있는, 절대 메울 수 없는 간격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체험,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복음의 실종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애초에 사람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그 앞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이 없는 곳에 죄가 있을 수 없고 죄가 없는 곳에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만 찾아야 할 거룩함이 실종된 교회는 필연적으로 인간 속에서 그 가치를 찾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마케팅 교회는 언제나 '나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넘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경계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옳고 그름의 경계, 참과 거짓의 경계,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 모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이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라진 교회에서는 그런 경계들이 사라집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까지도 사라집니다. 이런 모든 경계가 사라진 교회는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그것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감동적인지 아닌지, 그것이 효과적인지 아닌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마케팅 교회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거부감과 부담을 주는, 그래서 제거해 마땅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실상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채워주시는 분은 친절한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속에 빛나는 영광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설문조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마케팅 교회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실종시켰습니다. 인간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고객만족을 지향하는 마케팅 교회가 주는 만족은 도리어 더 큰 굶주림만을 낳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심리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 영혼은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헛된 가르침과 방법을 떠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선포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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