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의학개론_교리사 연구
교리는 신앙의 근본 요소가 되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구체적 내용이며, 그 보다 좀더 협소한 의미의 교의는 어떤 문제에 직면한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내용들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새롭게 성찰하여 재조직, 공식화하여 교회적으로 공히 인정(결정)을 받는 것이다. 교회의 신조서들(사도신경, 칼케톤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속에 표현된 교리적 진술이 바로 교의이다.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할 신앙의 규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의학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교회의 태동기에 정경은 구약이었으며 대부분의 신약 문서들은 AD 100년 이전에 작성되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쯤에는 구약이 완전히 구색을 갖춘 형태로 존재했었고, 신약의 문서들도 점차 정경성을 확인하게 된다. 구약정경의 원용 및 신약문서들의 정경으로의 승인은 교회의 처음의 기초적 교리 결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대 교회 수세기에 걸쳐 신학적 반성과 문학적 활동의 주된 중심은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수도 안디옥)와 소아시아를 포함한 동북 지중해 지방이었다. 카르타고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터툴리안을 들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법적이며, 스토아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같은 지역의 대표적인 선구자들로는 로마의 클레멘트, 헤르마스와 제 2 클레멘트 등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경우 오리겐이 대표적인 학자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진리의 주요 범주를 다루며, 플라톤적인 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필로(유스틴)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이 이 학파에 속한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경우 이레니우스가 있으며 목회적이고 역사의 범주를 주로 다루며, 신약의 대부분과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데오빌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시대에, 교회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 그리고 이교의 도전과 정치적 박해에 직면하였으며,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의 신학도 이해되어야 한다. 특별히 다신론 신앙의 이교주의의 도전 아래 최초의 기독교 신학 논저들이 유스틴,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등등에 의해 쓰여졌다. 터툴리안과 오리겐의 저술들의 주된 목적도 이교도의 비난을 논박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기독교 유일 신론과 창조교리에 관해 변증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단의 위험은 이교주의보다 신앙의 핵심을 더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기에, 신앙의 본질적인 국면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의견들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이단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영지주의 분명 초기 기독교회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였고, 그들이 주장하는 바, 은밀한 지식 혹은 영지를 통한 구원의 획득의 논리는 결국 극단적 이원론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것과는 달리 마르시온의 경우에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열등한 신으로,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마르시온은 이와 같이 세계가 여호와의 창조라고 믿었고, 그 질료가 저 열등한 신의 힘에 종속된다고 생각함으로 예수는 인간 탄생의 자연적 방식을 통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육은 우리의 육신과 다르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창조 및 원죄에 대한 이해를 발전 시켰다.
터툴리안은 여러 이단에 반대 했지만, 특히 마르시온을 반대하는 것에 가장 광범위한 저술이 나타난다. 그의 법적인 관심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법률가요 재판관으로 보게 한다. 그의 삼위일체를 논의하는 방식 속에서도 이런 성격이 드러나는데, “한 본체와 세 위격”이란 정식(formula)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위격(person)과 본제(substance)는 법적 단체들에서 사용되는 용어였다. 그는 법적 개념을 사용하며 그의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지상의 주권자나 법제정자와 비교한다. 그리고 그의 창조 이해 역시 마르시온에 반(反)하여, 모든 존재하는 바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진술한다. 또한, 선재(先在)하는 물질로부터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헤르모게네스에 대한 논박에서 그는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주장했으며, 이것 역시 기독교 교리가 되었다. 오리겐과 이레니우스와는 다르게 그의 원죄관은 차이를 보인다. 원죄는 유산이었고, 우리 영혼의 특징들도 유전된다고 믿었다. 이런 유전된 성질들 중에 죄가 있어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이유이다.
오리겐 역시 이교 다신론과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있지만, 터툴리안과는 다르게 이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과 그 철학적 전통에 속한 다른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논증하였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알레고리(비유)적인 해석을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분으로서 "단순한 지적 본성"이며, 그의 품성으로서 우리는 사랑, 진노 등등을 오직 비유적인 방식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다. 오리겐의 두 가지 창조 교리는 교회 내에서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영지주의 교리를 거부하지만 마지막에는, 비록 하나님이 진실로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그 창조는 피조물의 죄의 결과였지 창조주의 영원한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리겐의 원죄 교리는 인간 존재가 출생 순간부터 죄인이라는 전제에서부터 나간다. 이것 역시 교회 역사적으로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하나이심과 권능을 강조한다. 그의 주된 관심은 성경과 예배 및 경건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삼위일체 교리는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데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및 성령이심을 아는 것과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계 및 우리와 관계하시는 방식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세상과 관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나님의 손"이라는 이미지를 언급했다. 그의 손이 창조의 역사와 역사의 인도에 있어서 세상 안에 들어오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전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 창조는 하나님과 인간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 피조물이 성장하여 계속 증가하는 신성과의 교제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인간존재는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을 지닌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부분이었지 단지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함축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통에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봉사하는 역할이며,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악의 지식을 획득하여 영원히 살며 “신들처럼” 되도록 의도하셨던 것이라고 한다. 이레니우스의 신학에서 모든 인류가 단일한 몸과 같으며 그 머리는 아담이라고 믿었다. 그의 구속론에서, 인간의 유대성과 우리의 공통된 죄의 속박에 대한 강조가 특징이다.
신앙고백이 담긴 신조는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데, 2세기에 다양한 신앙형식들이 발견된다. 신조의 형성 과정은 2세기에 잠정적인 종결을 맺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신조라고 불리는 고대 로마의 세례고백과 비슷한 신조들이 서방 대부분의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왔다. 동방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신조들의 형식에서 훨씬 다양성을 지녀왔다. 동방신조는 하나님 아버지를 통한 그리스도의 선재적 출생에서부터 이해한것이 로마신조와는 다른 특징이다. 신앙고백 형식문은 원래 세례 후보자의 교육에 삶의 자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조가 기독교 신앙의 형식적 요약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포괄적 지점으로 확대되었고, 초신자 교육의 기초가 되는 신앙규준이 되었다. 신앙규칙은 일종의 교리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신앙규칙은 이설과 정통의 확인을 위한 규준에 봉사하였다. 터툴리안은 신앙규칙에 관해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기인하여 사도들로부터 다음 세대에 전해진것이라고 했다.그들은 흩어지기 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가르침들을 선포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설교에 공동의 기초를 확정지었고 사도신경을 규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조들을 차후 시대에 신앙의 척도로 전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신앙규칙과 신앙고백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선포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4세기) 삼위 일체 교리가 형성되기 위해서 기독교 바깥의 자료들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삼위 일체 교리의 시발점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하지만 초대교회는 신약을 통해서 삼위적 형식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하나님이 한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삼중의 양태인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성령으로서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확립하게 된다. 단일신론은 다원론에 반기를 들었고 유일신론을 똫나 기독교 안에서 지키려고 했다. 단일신론자들은 아들의 신성이 단지 파생된 신성이며 아들에게서는 아버지의 현현방식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AD200에 여러 교회에서 주장되었는데 하나님은 단지 유일한 인격이며 아들과 영은 단지 한 분이신 하나님의 현현 방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없애기 위해 지상의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복음서를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삼위일체와 관련한 저스틴의 언급은 불명료함을 드러낸다. 2세기 말 이후에야 조금 더 명료한 신론에 도입된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다원론적인 언어방식을 피하려고 했으며 4세기의 정통 삼위일체교리와는 다르게 자기와 함께 하면서도 자기 이외의 자신의 말씀과 지혜를 지니는 아버지의 위격으로 출발한다. 그래서 아들의 지위와 영의 지위가 명백하게 표현 되지 못했다. 신적 위격에 관한 교리 전개에서 이레니우스는 단지 구속사를 근거로 하여서만 이루어졌다. 터툴리안의 경우 하나님의 통일성 및 위격들의 삼위성을 표현한 뚜렷한 형식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중요성을 차지한다. 세 위격속의 하나님의 실체를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그들의 존재를 통하여서가 아닌 그들의 등급을 통하여,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서가 아닌 형태를 통하여, 그들의 현현을 통하여 구분된다고 했다. 당시 신론에 대한 사상들을 엄밀하게 총괄하고, 단일신론과 영지주의를 물리치는 효과를 가져왔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오리겐에서 발견되는데 성경에 대한 본문 비판 작업을 시작하여 최초의 기독교 교리학이 그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오리겐은 이전 두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으며, 위격들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신성은 아버지에게서 유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오린겐은 신성의 세 위격에 대해서 본질들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삼위일체교리는 신약의 전통에 반대하여 올리우신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거절하는 사실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적 체계를 방불케 하는 교리들을 세우기도 한다. 그의 영원한 창조의 가정은 교회의 가르침과 성성의 진술들과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조의 영원성을 거부했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신학을 변조하고 개조하게 되는데,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초월적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필경 창조된 것이며, 이것은 그 사물이 필경 무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사상을 단호히 거절하고, 그러한 사유방식은 하나님에게 물질적 범주들을 씌우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아들은 완전한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 중의 하나와는 같지 않다고 말했다. 신론에 관한 그의 구상은 위험한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완전 인간도 완전 하나님도 아닌 일종의 반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아리우스는 논쟁으로 치닫게 되는데 황제 콘스탄틴이 그 논쟁을 떠맡고는 니케아 회의를 325년에 개최한다. 이 회의의 결과로 니케아 신조가 형성되었다. 황제 주관 하에 콘스탄틴은 자신이 그 고백에 삽입하였던 호모우시오스라는 개념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신앙고백에 서명하지 않고 파문당하게 된다.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아들의 완전한 신성을 증명하였지만 새로운 문제들이 다시 제기 되게 만들었다.다른 신적 위격들의 관계와 니케아 신조에 고백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복음서의 예수님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리우스에 반대에 서 있었던 아다나시우스는 항상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 본질 됨을 고수하는 것만이 구원에 대한 신앙을 확신시킨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니케아 회의 이후에 성령의 문제 또한 제기 되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동일하게 영을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시켰다. 아다나시우스는 영도 역시 하나님이며 그에 관해서도 동일 본질이 진술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여과 아들간의 결합을 강조한다. 아다나시우스는 완전한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켰지만, 위격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적절한 개념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명료성을 이끌게 되었다. 카파도키아 대 감독 대 바실리우스, 그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 주스의 그레고리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신론에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에서 출발하였고, 또한 아들의 동일본질과 성령의 동일 본질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행해졌던 거 보다 더 날카롭게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특성을 규명하였다.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위격들의 통일성 및 차이성을 고수하는 실제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능하게 했고, 동일본질이 유사본질의 의미로 아다나시우스로부터 정통이라고 선언 되었다. 이것으로 삼위일체 논쟁의 결말이 마련되었다.
삼위일체 논쟁 이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서로 관계하는가 하는 중요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기독론에 관한 것이며 삼위일체 교리와 중요한 관계성을 지닌다. 초기 기독교 가르침에 반대하여 에비온파와 가현설의 기독론이 있었다. 저스틴은 2세기에 접어들어 기독론을 발전시켰다. 로고스 개념을 받아들였고 희랍철학과 관련시켰다. 3세기에는 로고스 기독론이 오리겐의 영향으로 어디서나 관철되었다. 터툴리안은 3세기 초에 영지주의와 양태론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인간육신의 입으심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이며, 불가불리한 위격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신성과 인성, 신적인 영과 인간적인 육신의 결합을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전적 인간으로서 동시에 신적 로고스임을 말했다. 기독론의 형성에 있어 오리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는 신성과 인성의 분리에 있어서 말씀-육신-형태에 준한 기독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며, 나뉘어질 수 없는 생명체 생물이든가 아미면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육체가 그를 이끄는 원리로서의 로고스에 의존하였다. 그는 로고스가 어떤 영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로고스가 영을 대신하여 들어섰다고 결론을 맺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이 생겨남을 말한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은 여러 회의들을 통해 정죄되었다. 또한 안디옥의 “두 본성 기독론”은 극단으로 밀고 나가서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한 공격은 이번에는 단성론으로 발전된 한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또한 그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하였다. 그와 맞섰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시릴이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였다. 시릴의 사후에 유티케스 역시 하나의 본성만을 진녔다고 확신하였으며, 시릴의 후계자 디오스쿠루스는 유티케스를 옹호하고 예수님의 탄생 이후의 두본성에 대한 입장을 정죄했다. 451년 칼케톤회의에서는 단성론을 기각하였고, 시릴의 후기 입장으로 회귀한다. 431년의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정죄를 받은후에도 그들은 바로 사라진것이 아니라 시리아와 중국까지 퍼지게 되었다. 또한 451년 칼케톤에서 단성론이 정죄를 받은 후에도 이집트와 인근 영토들에 많이 남아있었다. 칼케톤의 기독론 논쟁은 동방의 기독론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에베소의 강도회의의 주범인 디오스쿠르스와 유티케스는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의 수난 논쟁이라고 불리우는 논쟁이 한 차례 불게 된다. 이 논쟁은 안디옥 학파 유형의 분리주의적 기독론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연결되어 있는 통일적 유형의 기독론이 새롭게 마주친것이었다. 제국의 새로운 주인인 저스티니안 황제는 분열을 막기 위해 해결책을 찾는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점점 칼케톤 정통에서 멀어져 갔다. 결국 기독론 논쟁은 681년 콘스탄티노플의 제6차 에큐메니칼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이 회의에서 단의지론자들과 그 지지자들 정죄당했고, 세르기우스와 호노리우스 등이 정죄당했다.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그리고 참 사람이며 하나님이라고 확정적으로 주장했으며,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신약이 말하는 예수님의 역사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구세주를 사색적이고, 논쟁적인 대상으로 삼았고, 위격, 본성, 에너지 등의 어휘로 담게 되었다. 구세주가 역사와 인간사의 주인이라기보다 정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동방신학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은 아레오파가이트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거짓 이름으로 자신의 저서를 출간한 소위 위 디오니시우이다. 이 저술들은 근본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미치게 했다. 그는 천상의 계층구조에 관하여, 교회의 계층구조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관하여, 신비신학 등을 저술하였는데, 신플라톤적 양식을 따라 세계를 계층구조로 파악하며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또한 천사의 계층 구조를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빛을 비추시고 백성들을 통치하시며, 이러한 복잡한 계층 구조는 하나님과 여러 존재들 사이에 서 있는 저급한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교회의 계층질서는 두 개의 근본적인 질서로 이루어졌으며, 각 질서는 3개 정도를 따로 갖는다고 보면서 첫 단계는 성직자 질서로 감독, 신부, 집사로 이루어지는 3부적인 계층질서로 보며, 다른 질서는 평신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인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이 본체의 두 본성 혹은 두 본질은 신성과 인성으로 접하게 되며, 따라서 이 두 본성이 성육신하신 말씀 안에 자존한다는 주장이 없음을 알게 된다. 반대로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성육신 이후 구세주가 인간적인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양식을 따라 속성의 교류를 극단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중세 전반에 걸쳐서 서방에서 인용되었다.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 일반에 대해 서술되었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서 어거스틴의 저술 활동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성육신에 있어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고 하며 삼위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삼신론에 빠져 들려는 위험에 대해 라틴신학을 경고하고, 보존하였다. 그는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효력 있는 성례전과 규례에 따르는 성례전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오직 교회 안에서 이 교회의 정식제도에 따라 집례 되는 성례들만이 규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많은 저서들을 내어놓았다. 그의 지식론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소멸적인 지식, 즉 단순한 앎보다는 영원하고 불가변적 실재에 대한 지식, 지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조명론으로 이끌어 간다. 인간의 이성은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자체적인 능력에 의해서 혹은 감각이 전해 주는 자료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조명으로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은총에 관한 이해에도 죄의 철저한 규정과 비슷하게 형성되었는데 특히나 은총의 필연성과 역사를 강조하였다. 부르심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그의 은총론은 신적인 은총의 행위를 죄사함의 관점하에서라기보다 인가의 회복, 즉 치유라고 한다. 그것은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예정론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은총의 역사의 필연성과 의지의 종속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지의 심리학적인 자유를고수 하였는데, 그는 이것으로 결정론의 철학적인 견해와 의지의 종속에 대한 그의 주장을 대조시켰다. 그의 은총론은 거듭되는 세기마다 영향을 미쳤다. 그는 죄, 은총, 죄사함이라는 중요한 질문에 신학적인 해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펠라기우스 논쟁과 반 펠라기우스 논쟁은 신론과 기독론과 함께 기독교 신앙 진술의 새로운 영역이 해명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죄와 은총의 교리에 대한 커다란 논쟁들은 동방, 서방에 결속력을 주었다. 이것은 희랍교회와 로마교회, 개신교 교회의 공동 유산이었다.
성례전 교리
그리고 다음에 제기된 문제는 성례전 교리였다. 성례전 신학의 특정ㅎ나 문제들에 대한 논쟁은 본래 성례전 교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의 결과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한것이었다. 성례전은 고대인들에게 있어 마음을 끄는 어떤 특별한 것이었으며, 성례전의 용어 sacramentum은 성례전 신학에 대한 후대의 관심의 발전을 위해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또한 성례전 이해의 내용적인 발전 역시 성례전 교리에 대한 후대의신학적 관점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 암브로시우스는 성찬에 대한 고대 교회의 사상들을 얼마간 결론지었는데, 그는 실재주의로 규정하였다. 어거스틴은 최초의 신학자로서 성례전의 본질에 대한 원칙적인 숙고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단순한 성례전과 그의 효과를 구별하고 있는데, 성례전의 단순한 의식과 효과간의 구분을 두고 있다.
중세의 성만찬 논쟁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이 중세에 끼친 영향은 성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예전(禮典)에 나타나게 되는데, 교리의 실생활에서는 암브로시우스의 실재주의가 우위를 차지하였고,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의 상징주의적 이해를 고수했다. 이런 가운데 성만찬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첫 번째 성만찬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사상 중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실재주의적인 화체론,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주의적인 해석인 재료의 상징적 특성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다음에 진행된 두 번째 성만찬 논쟁은 성찬재료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의 변형에 관한 이해가 화체라는 개념이 있지는 않지만 이때부터는 확고해졌으며, 그리스도가 모든 성체 속에 임재하신다는 사랑이 관철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편재와 보편성의 사상과 희생이 강조되며, 결국 실재론적 경향이 상징주의적 경향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논쟁이후에 계속적인 성례전 개념이 계속적으로 발전하였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또 한차례 논의되어진다.
칭의
교리사의 분열과 분리는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 본질적으로 더욱 가속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초점은 어떻게 보면 칭의론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점은 그 자체에 있어 단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칭의에 대한 문제에만 관계하였다. 그러나 그 발견은 사실상 시초에 포괄적인 새로운 신학을 포함하였다. 결국 카톨리시즘의 전(全) 위계질서와 교회법의 이해는 루터가 처음에는 실천 규범 속에서 가능한 소중하게 다루려고 하였다 할 손 치더라도 붕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중요한 교리사적 관점의 변화는 고백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이 고백은 단지 하나님 앞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이 그의 고백과 아울러 동시에 그의 이웃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자들이 새로운 고백을 정식화하려고 했으며, 새로운 방신으로 신앙을 진술하려는 내적인 절박성으로부터 성립되었다. 루터에 의한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한 고백서”에서 그는 그의 신앙을 정식화 했다. 또한 그는 다른 고백들에서 고대교회의 교리들을 철저하게 승인하고 받아들였다. 루터에게는 기독론과 구속론이 매우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매우 강력하게 의도적으로 강한 연결을 수행하였다. 종교개혁의 고백문서들은 많은 점에서 고대 교회들과 구분되지만 또한 중세기의 교리 결정들과도 구분되었다. 칭의론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멜랑히톤의 “신인협력설”, 즉 신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함께 역사한다는 교설과 관계한 것과, 성만찬 교리, 기독론의 특정한 문제들과 또한 율법과 복음의 교설이 있었다. 두 개의 큰 프로테스탄트 교회형태, 즉 루터교회와 개혁파 교회의 생성은 교리사적 의의를 지닌다. 칼빈을 통하여 형성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가 고백의 의무를 강조한 점에서 하나의 특성을 지녔다. 성만찬에 있어서는 쯔빙글리보다 루터에 더 가까웠다.
카톨리시즘은 근세에 절대적으로 결속력있는 신앙명제들을 교리화하였던 유일한 기독교 교파였다. 카톨릭 교회의 최근의 전체 교리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단지 시발적으로도 신약과 고대교회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문제들에 관계한다. 새로운 교리에 대한 고전성 증명은 카톨릭측에서 또한 소유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이런 신종교리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발판은 성서와 전통의 관계에 대한 트리엔트 회의의 규정을 통하여 생겨났다. 사도의 구전승을 성경 권위와 일치시킨 것은 카톨릭의 새로운 교리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종교개혁의 개신교적 효시는 포기될 수도 포기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많은 문제들 속에서 아직 종국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카톨릭 측의 마리아 론의 형식상은 기독론과 많은 연관성 및 유사한 점들을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교회의 다른 교리들과 구별되는 장구한 발전을 해왔다. 결국 마리아론은 신약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무오성의 교리에서 굳건한 전권적인 교회정치가 교황권위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하는 것은 교황의 권력이 정식적이고 직접적인 주교의 재판권에 대립되어서는 안되며, 이런 재판권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임명된 주교들이 사도들을 대신하며 참된 목자로서 자신들에게 배당된 무리들에게 꼴을 먹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리아 몸 승천의 교리는 더욱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 근세 카톨리시즘의 두 다른 교리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가 중요 논점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결국 그들은 공동구속 행위의 교리화로 나갔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 교리사는 많은 다양한 형태의 이유에서 교리적 위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나 그 원인들이 정통주의시대에 신학적인 작업이 겪었던 그 변화에 있다. 동시에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위기의 근거는 역사적 사고의 대두에 있었다. 그러나 교리의 위기가 교리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정통주의, 즉 종교개혁의 토대위에서 고전적인 위대한 교리적 초안들을 이야기하였던 바 그 순수교리의 우세함으로써 이 시기가 특징지어진다. 교리사적 관점에서 정통주의의 특징은 성경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통주의 신학이 그의 성경 축자영감설을 최종적인 귀결들로 발전 시켰을 때 벌써 여러 측면에서 이것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 일어났었다. 역사적인 순서로 볼 때 정통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경건주의가 일어났으나 물론 매우 큰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대체되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처음에 경건주의가 맹세한 교회 가르침에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경건주의에서 한 새로운 정신이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논쟁은 매우 날카롭고 좀스럽게 자주 이루어졌다. 양자 사이에 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에 대한 역사적 사고와 그 사고의 결과인 새로운 문제가 이미 경우에 따라서 희상되고 있다. 교육의 세속화와 정통주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또한 비판적, 성찰적으로 역사를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고는 매우 빠르게 과학적 신학적인 작업의 방법으로 발전되게 되었으며, 이 방법은 계몽주의 신학자들의 시대제약적인 철학적이며 신학적 학문체계로부터 대폭 독립적이었고 그 때문에 관념론과 낭만주의의 세계관적인 계몽사상이 몰락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었는데 결국 19세기의 역사주의와 같은 운동들은 실제로 생성시킬 수 있도록 도왔으나, 그럼에도 이들 운동들과는 구별되어 본래적 방법론적 승리를 현재에 와서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 사고의 대두는 인류의 정신사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운동들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 사유가 신학과 교회 내에서 처음과 오랜 기간 동안 걸쳐 파괴적이고 붕괴적인 의미에서 주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근세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전 시대들과 같이 단순히 더 이상 특정한 고백들을 작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정시사적인 운동 안으로 돌입하였으므로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교리나 교리사의 종말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래된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적응의 과제가 부과되었다. 이 점에서 슐라이에르마허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종교를 이해하였다.
이후 칼바르트의 신학적 작업을 통한 개신교 신학의 새로운 등장을 통해 교회의 복음 선포와 그 신앙에 대한 근거와 원칙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신 프로테스탄티즘의 시대에 교회 신앙의 중심점을 놓쳐 버리는 신학적 작업이란 그릇된 것이라고 소급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개신교가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고 결속력 있게 진술하는 과제를 직시하고 착수 함으로 독일교회의 바르멘 신학선의의 의의는 교리사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그 후에 진행되는 문제는 교회일치 운동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교회일치 운동의 중요성이 실천적 형태의 특정한 문제들을 위한 공동의 강령을 만들어 내려는 것과 몸된 교회들에 대한 상호간의 이해를 신장하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교회 일치 운동은 그것이 성립된 이후에 헌장 속에 표현된 사상들보다 영향력이 더 넓은 고유한 원동력을 보여주었다. 교회 일치라는 개념 안에는 오늘날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이해들이 서로 대립하는데 이 이해들은 많은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두 모델은 “공의회의 교제” 및 “화해된 차이성”으로 불리운다.
참고문헌
기독교 교리사, 컨콜디아사, 베른하르트 로제
기독교 신학사 입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윌리엄 C. 플래처
기독교 사상사(2), 한국장로교출판사,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정보 > 성경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총론:::: 현대문학비평 (0) | 2014.03.04 |
---|---|
구약 특수 정경론_ 오경비평사_역사문헌비평과 전승사 비평 (0) | 2014.03.04 |
필수 구약 암송 70구절 (1) | 2014.03.04 |
여호와의 일기_[하나님의 큰일] 중에서 (0) | 2014.02.22 |
구약총론 필기_구약성경 오경비평사 (1) | 2014.01.03 |
바르트의 신학 (0) | 2014.01.01 |
중세스콜라신학의 방법론과 사상적 배경 (0) | 201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