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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성경자료

구약총론 필기_구약성경 오경비평사

by reviewer_life 201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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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총론 필기

 

 

각 신학분과의 연구방법은 각기 다를 지라도 결론은 항상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 구약정경론은 모든 신학 과목의 기초가되는 학문이다.

헬라어 카논은 공식화된 신앙고백 혹은 교회의 교리와 여러 가지 교회법을 가리킨다. 정경이란 단어는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신조 18항에서 처음 사용했다.

라틴어 용법에서 canon은 성경자체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정경을 생성하실 때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사고가 전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정경의 기원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진리는 성령이 성경저자를 영감시켰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의 신적인 권위에 눈이 열렸다는 것이다.(이중영감)

성경은 자증적이다.

교회의 공의회가 정경에 신적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인정했을 뿐이다.

 

모세시대에 이미 율법의 수집이 글로써 확정되었다.

구약에서 이미 백성이 종종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오경이 언제 종결되었는지 모르지만 오경에는 처음부터 큰 권위가 부여되었다.

요시아 통치 때의 율법(신명기),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오경), 전선지서의 권위가 인정되는 이유는 여호와의 행위를 묘사했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정신을 따라 기술되었으며, 그 저자들이 직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후선지서의 문헌들이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사건의 성격에 의한 것이다.

시편의 표제가 그 시편의 출처를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지혜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지혜자이다.

많은 잠언이 솔로몬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잠언서를 정경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된다.

역대기는 열왕기와는 다른 방법인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을 따라 기록되었다.

요세푸스는 구약 역사서가 적어도 에스라시대(5세기 중반)에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에스라 시대에 구약의 모든 책이 기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구약정경이 완결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불가능하다.

구약정경을 형성하는데 에스라가 특별한 역할을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구약정경의 상당한 부분이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수집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카비 1서에 성경이란 표현이 정경을 뜻하는 것 같으나 그 당시에 완결된 정경이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하실 때 구약은 신적권위를 가진 성경으로서, 이미 완결된 수집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신약은 구약 전체를 가리켜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히브리 정경의 첫 번째 책(창세기), 마지막 책(역대기), 정경은 역대기로써 끝났다.

신약에 인용 안 된 구약(에스더. 전도서, 아가서, 에스라, 느헤미야, 오바댜, 나훔, 스바냐)

얌니아는 예루살렘 멸망 후 성경 연구 중심지인데, 여기서 정경을 확정짓는 일을 한적은 없다. 구약정경은 1세기 유대인들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던 것을 확정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70인경은 외경의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의 구약정경은 유대교의 정경까지로 한정된다. 이것은 멜리토가 작성한 정경목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교회는 더 많은 문서를 가진 70인경을 사용했다. 하지만 70인경의 모든 책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히포와 카르타고 회의는 첨가된 70인경을 정경으로 인정했다.(주도자: 히에로니무스, 어거스틴)

종교개혁은 다시 유대인의 정경으로 돌아갔으나 1546년 트렌트회의는 히포와 카르타고의 결정을 따랐다.

 

오경비평사

구약정경론의 출발점은 성경의 자증을 받는 것이다.

구약비평과 신약비평은 그 원리는 같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 이유는 역상의 길이 차이와 자료의 양적 차이에 기인한다.

원래 유대인 뿐만 아니라 신생 기독교회도 모세가 오경의 저자임을 확고하게 믿었다.

요세푸스와 필로는 그 마지막 구절까지도 모세의 글로 본다.

 

1. 중세시대

중세에 이르러 랍비 이븐 에즈라가 창세기에서 후대 첨가를 생각했다.

 

2. 종교개혁시대(비평이론에 일치를 보지 못함)

종교개혁이 로마카톨릭과 투쟁할 때 벌게이트가 아니라 원문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 안드레아스 보테니틴 : 모세의 연설에서 다른 문체가 만연하다고 했다. 결국 후대 저작의 문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 안드레아스 마시우스 : 오경의 지금형태를 에스라에게 돌렸다. 즉 모세저작은 인정하지만 후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3. 계몽주의시대(아직까지 교회적 전통은 완고했고, 비평적 견해는 개인의 견해였다.)

* 토마스 홉스 : 오경의 일부분은 모세가 기록했다기 보다는 모세의 대해서 기록된 것이다. 구약전체의 연대를 포로귀환 이후로 봄.

* 이삭 드 라 피에르 : 모세가 광야의 일에 대해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 과거의 역사를 붙임. 오경에 모세의 저작이외에도 다양한 원전이 있다. 아담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지 인류의 조상이 아니다.

* 스피노자 : 모세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는 부분, 만나, 단에 대한 부분을 문제 삼음. 오경의 저자는 에스라일 것이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명백하다.”

* 리챠드 시몽 “; 모세가 율법을 기록했으나 더 오래된 구전이나 기록된 자료를 사용했음. 여기서 전승과 편집개념이 도입됨.

* 쟝 드 클럭 : 오경은 722년 앗수르 왕이 팔레스틴에 보낸 제사장의 작품일 것이다. , 민에 나오는 선지자는 시대착오적 현상이다. 오경을 모세 개인의 편집으로 보는 점에서 시몽과 차이가 있으나 전승과정의 결과로 보는 점은 일치한다.

 

4. 아스트뤼에서 벨하우젠

* 비터 : 최초로 원전가설에 대해서 언급한 목사. 그는 자신의 책에서 창세기에 서로 다른 신명이 사용됨을 보여주었다.

* 아스트뤼 :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주장. 그러나 신명의 차이로부터 그는 모세가 두 개의 주된 문서를 가졌음을 주장. 여기서 초기형태의 원전가설이 등장함(창세기에만 국한)

* 아이히호른 : 신화라는 말을 구약에 도입함. 현재 형태의 오경은 여호수아와 사무엘 시대에 이루어진 것.

* 칼 다비드 일젠 : 창세기에 세 명의 저자가 있다고 주장( E1, E2, J), 이 견해는 신문서설의 동기가 됨.

* 게데스 : 이전의 견해들은 신명에 근거하여 창세기의 두 흐름을 주장했으나, 게데스는 오경에는 다양한 율법의 묶음이 사상적으로 교차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단편설을 주창함. 바터는 이 견해를 수용하여 창세기에서 자그마치 38개의 단편을 구분했음. 이 부류에서는 오경의 핵심을 신명기나 창세기 또는 출애굽기로 보고, 이 책들을 다윗-솔로몬 시대로 돌린다.

* 데 베터 : 단편설 추종자. 오경의 이야기는 원래 독립적인 글임을 주장하면서 단편설을 옹호했고, 오경의 내용적 특징을 신화와 민담으로 보았다. 그는 역사비평을 문헌비평과 연결시켰다. 그는 또 하나의 원전에 여러 단편이 붙었다고 말해서 보충설의 근거를 제시했다.

* 에발트 : 단편설을 전복시켰다. 그는 신명이 다른 것은 고대근동문학에서 나타나는 특징임을 주장하면서 창세기의 통일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오경 전체에 Elohim을 사용하는 문서가 있었는데, 후대에 하나님을 Jahwe라고 부르는 문서가 새로 생겼다고 주장하였고, 그리고 제 3자가 J의 일부분을 E에 삽입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보충설을 제시했다. 이 견해는 델리취가 옹호했다. 에발트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EJ가 오경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보충설은 에발트 자신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번에 그는 절충가설(결정가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문서설과 단편설을 결합한 것으로 원래 J는 없었고, 오경의 핵심이 점점 성장하여 E1, E2를 형성했고, 나중에 다섯 번째 확장단계에서 제 3자에 의해 J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핵심적 문제는 문서설의 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리임 : 신명기를 철저히 연구하여, 신명기를 독자적인 문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경은 네 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을 만들어냄.

* 후펠트 : 창세기만을 연구한 결과, 신문서설을 만들어냈다. J는 보충자라는 기존의 견해에서 벗어나 JE2와 관계가 있음과 J는 창조기사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각각의 E1, E2, J가 독자적 편집자에 의해 합쳐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E1은 제사장적 경향을 반영하고 E2J에 동의한다고 했다.

* 헤겔 : 헤겔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종교를 3단계로 나누고, 1단계를 자연종교라 하고 2단계는 개인적 종교라 했으며, 3단계를 절대종교라고 했다. 여기서 종교는 나선형으로 위로 가는 길을 추구한다. 구약과 이스라엘 종교에 헤겔의 사상을 가장 강하게 적용시킨 자는 파트케와 George이다.

* 퀸넨 : 헤겔의 입장을 취하여 문서설 방향에 변화를 반영했다. 그는 J의 독자성과 E1E2의 차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E1에서 늦은 것과 이른 것이 공존함을 발견했고, 그에 따라 E1이 예루살렘 제사장 그룹에서 발생하여 신명기 이후에 최종편집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경의 편집자는 D(신명기)가 아니라 제사장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5. 그라프-퀸넨-벨하우젠의 전복(고등비평의 시작)

* 루스 : 파트케와 조지의 스승. 오경의 역사 부분은 율법에서 떼어내어 독자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함. 오경에서 역사적 부분이 율법적 부분보다 오래되었음을 주장.

* 파트케 : 벨하우젠이 그의 견해를 수용함.

* 존 콜랜소 : 그의 비평은 가장 파괴적이다. 그는 오경의 보도가 비역사적이라고 한다.

* 율리우스 파퍼(랍비) : 기본문서(E1)는 장시간에 걸친 전승의 결과이다. E1은 보충된 것이 아니라 보충자이며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주장.

* 그라프 : ‘기본문서(G)-Jehovist-신명기적기자의 순서를 언급하면서 신명기기자는 편집자라고 주장. 그는 기본문서를 둘로 나누었다. 그는 E1을 가장 늦은 부분으로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이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더 늦은 입법자가 모방한 언어의 일치로 말미암은 혼란이라고 했다. 여기서 퀸넨은 단지 제사적 율법수여 뿐 아니라 제사적인 역사자료도 후대의 것이라고 결론내림.

* Noldeke : 안티그라프적 입장. 기본문서(G)-Jehonist-편집자의 순서를 만했다. 그는 후펠트의 이론을 개선한다. 후펠트는 편집자가 E1, E2. J를 독자적으로 가졌다고 했지만, 그는 편집자가 E2J를 결합된 상태(Jehovist=JE)로 가졌다고 말했다.

 

6. 벨하우젠(역사가, 언어학자, 문헌비평가)의 이스라엘 역사 서설.

* 문헌비평에 있어서 Noldeke를 받아들여 JE, D, P(NoldekeG에 해당하지만 벨하우젠에게는 가장 늦은것이다.)의 세 문서를 취한다. 결국 후펠트 노선에서 문서를 분류하고, 그라프-퀸넨 노선에서 문서의 연대(순서)를 결정한 것이다.

* 절기(무교절, 칠칠절, 장막절)는 원래 농사축제였다. 이것이 후대에는 역사적 사건(출애굽, 가나안 정복 등)과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 신명기적 편집이란 D의 정신속에서 자료를 다루고 P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루는 단계이다.

* 사무엘서와 열왕기는 포로시대에 최종편집 되었다.

* 제사장과 선지자는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으며, 그래서 선지자가 제사를 거부했다.

* 창세기 1장은 마지막 발전단계이다.(P로 분류)

* 옛 전승은 P의 포로 후의 입법의 관점에서 완전히 개정되었다.

* 현재 오경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출판되었다.

* 이스라엘의 규율은 성문화 되지 않았었다.

* 이스라엘에 신정은 없었고 단지 예언자의 이상이 있었을 뿐이다.

 

6-1. 이스라엘 역사서설 평가

그는 헤겔을 따라서 현상보다는 전제에 관심을 갖는다.

신명기가 개혁이라는 표현은 틀렸다. 개혁이란 옛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제사를 반대하는 것은 믿음이 결여된 제사 행위를 반대하는 것이다.

율법책이 없었다면 선지자들의 책망과 멸망에 관한 선포는 근거가 없는 것이 된다.

포로후 시대가 비정치적 시기라고 마러하지만 그 시기는 마카비 항쟁 등 투쟁의 시기였다.

포로 후기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회당만 보더라도 제사의 중앙화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터부터 벨하우젠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신명은 문서의 기원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에발트는 신명의 차이가 셈어와 히브리어의 특징이라고 언급하면서 창세기의 통일성을 주장했다.

 

7. 벨하우젠 이후의 역사문헌 비평

* Budde : J를 둘로 나누었다.(J1, J2)

* 스멘트 : 다섯 원전가설을 주장했다. (J1, J2, E, D ,P)

* 아이스펠트 : 평민자료(L)을 언급했다. 이것은 P에 반대되는 것이다.

* 파이퍼 : 아이스펠트와 달리 창세기에 남방자료(S)가 등장함을 언급.

* Fohrer : 아이스펠트의 LN으로 표시.

* 헴펠 : J를 셋으로 나누었다.(J1, J2, J3)

* Staerk : J에 대한 구분을 반대하면서 J는 하나의 단위라고 주장.

* Volz : E의 독자성을 부인. JE를 나누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유는 신명이 문서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루돌프 : Volz에 반대하여 J를 독자적인 것으로 보면서 P의 존재도 함께 인정한다.

* 모빙켈 : 루돌프와 같이 P의 존재를 인정한다. 대신에 E의 독자성을 부인한다.

 

결국 전부 가설임.

 

8. 헤르만 궁켈

그의 관심사는 구약종교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 종교 간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벨-바벨 논쟁은 특별히 고대 근동의 종교가 이스라엘 종교에 미친 영향을 범바빌로니아주의의 입장에서 다루었다.

벨하우젠에 있어 오경의 문서는 각기 이스라엘 특정 역사의 생활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궁켈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현재 구약의 설화와 율법의 배경들은 특정한 장소/관습과 관련을 맺으며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본래적 배경을(Sitz im Leben, 삶의 정황, 생장지;신 교수님이 선호함)이라고 했다. 궁켈의 이러한 견해는 양식비평 또는 전승사 비평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8-1. 궁켈의 창세기 주석

사가 :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통속적이고, 오랜 전통을 가진 시적인 이야기. 사가는 그 미적인 영향으로 깊고도 높은 수준의 것이다.

역사를 다루는 사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론적 사가이다. (이것은 민족적, 어원론적, 제의적, 지리적 사가로 나누어진다.)

작고 단순한 것일수록 더 오래된 것으로 본다.

베벨론 사가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에서 변화되었다.(바벨론 홍수-노아홍수)

요셉이야기는 애굽의 설화에서 왔다.

이스라엘 종교는 저급한 단계에서 높은 이념, 곧 유일신론으로 발전했다.

J, E, P가 있는데 J, E는 편집자였지만 P는 전수받은 자료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성한 작가였다. 에스라 이후에 최종 편집자가 PJE를 한데 묶었다.

 

8-2. 궁켈이후 전승사적 입장

* 그레스만 : 양식비평의 방법을 창세기 설화에 도입하고 이어서 출애굽기 각 단락에 적용.

* 알트 : 율법을 조건법과 당위법으로 나누었다. 조건법의 Sitz im Leben은 백성이고, 당위법의 Sitz im Leben은 조상들의 신을 섬기는 데서 왔다.

* 폰라트 : 육경전체에 양식사적인 방법을 적용. 그는 땅점령 전승(Landnahmetraditin, Sitz im Leben : 길갈)을 지리적 종점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으로 간주한다. 육경을 J 편집자 개인의 작품으로 여겼는데, 이 견해는 편집비평의 길을 열었다. 그의 연구는 신학적인 관심에 관련이 있다. 그의 결정적 질문은 이스라엘에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무엇을 믿고 어떤 신학적 고백을 했는가이다.

* 노트 :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는 하나의 큰 역사적, 신명기적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폰라트의 중심적 생각이었던 땅점령전승이 나오는 육경의 개념을 부정했으나 JE가 땅점령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인정했다. 그는 4문서설을 주장했다.(J, E, D, P / 여기서 JE는 상호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봐서 독자적 기원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경의 전통은 12지파 동맹(그리스의 인보동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2지파는 한 달에 한 차례씩 제사를 분담했다. 노트는 오경의 생성을 점진적 과정으로 보았다. (노트에게 J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의 표면만 J의 작품이고, 다른 주요골격들은 J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트는 역사적 서술을 기본으로 했지만, 라트는 신학적 입장을 기본으로 했다. 즉 둘은 실제역사와 신앙으로 채색된 역사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8-3. 스칸디나비아 전승사학파

* 페더슨 : 벨하우젠학파의 이스라엘 종교 발전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

* 니버그 : 기록된 구약은 포로후기 유대 공동체의 산물이고, 성문화되기 까지 구전에 의존했다고 주장.

* 이반 엥넬(웁살라 학파 창시자) : 페더슨과 니버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료의 전승에서 구전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창세기에서 열왕기는 P(창세기-민수기)D(신명기-열왕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PD의 결합은 D가 했다.

* Widengren : 이스라엘에는 문서를 빨리 성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초기 이스라엘에 문서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언급.

* 모빙켈 : 전승사와 문헌비평은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고 주장.

 

8-4. 전승사비평에 대한 평가

궁켈의 이론은 전반적으로 헤르더의 낭만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

궁켈은 민담과 역사의 관계가 시와 산문의 관계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창세기의 설화에는 역사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 즉 원인론적 민담이 과거의 허구적 사건을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궁켈에게 민담은 순수한 신화는 아닐지라도 허구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인 신빙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궁켈은 또 종교사학파(비교종교학)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종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 평가하는 것이다. (종교사학파의 창시자 :아이히 호른) 이 관점에서 그는 창 1장이 바벨론의 마르둑신화가 이스라엘에서 발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극단적 범바빌론주의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에서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고 보기 때문에 즉 이스라엘 종교의 특수성을 인정) 그러나 그에게 있어 계시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확대된 보편적 개념이었다.

폰라트의 구약신학은 출애굽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믿음에 의해 채색괸 신학적 역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창조를 역사적 내용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 노트는 성경 역사로부터 허구적인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비실제적인 전승의 역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승사학파에서는 성문화의 요소로 민담이나 구전을 많이 의지하는데, 사실 Widengren도 말하듯이 고대근동의 국가들은 전승의 변경을 방지하기 위해 전승을 빨리 성문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9. 로마카톨릭 진영

* Vaux : 오경은 JEDP로 구성되어 있다. 오경의 기원을 모세가 지배하던 시기라고 언급.

* Gazelles : 4문서설을 옹호하며 고고학 발굴을 중요시함

 

10. 유대인 학자

* Jacob : 창세기를 조작으로 나누면 안 된다고 경고. 그러나 모세의 저작권은 부정.

* Cassuto : 호머와 우가릿 서사시와 오경과 비교하여 헬라문화와 가나안 문화간에 연결이 있다고 주장.

* 카우프만 : 전체오경은 포로 이전의 것. PD보다 오래되었다. 율법보다 선지서가 앞선다는 벨하우젠의 입장에 도전하면서 선지서에는 율법의 영향이 많이 나타남을 언급.

* 올브라이트와 그의 학파: 종종 너무 성급하게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성경적 자료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11. 개혁주의 진영

* Noordzjj : 오경이 여러문서에서 성장했음을 인정하지만, 벨하우젠 학파의 자료분류와 연대측정을 신뢰할 수 없다.

* E J Young : 모세가 기존 문서를 오경에 인용했을 가능성을 인정.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오경은 모세의 작품이다. 물론 기존 문서의 사용과 후대의 작은 첨가나 수정이 있을 수 있다.

* Moller : 오경의 통일성과 정교한 구조를 강하게 주장. 모세가 성문화된 전승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인정.

* R.K. harrision : 오경은 사무엘 시대에 오늘의 형태가 되었다.

* Aalders : 오경은 모세 이후의 편집자의 작품

* W H Gipsen : 오경의 편집은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했을 것이다.

 

12. 현대 문학적 비평

최근 20여년간 구약학계의 두드러진 변화는 저자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본문 자체나 독자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신비평 : 본문이 완전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본문의 최종적 형태에 집중하는 비평방식. 말씀의 역사성에는 과심을 두지 않고, 정경의 현재적 의미만을 중요시한다.

* 구조주의 : 성경 본문의 문학적 틀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주관적이어서 결론이 가지각색이다. 구조분석 자체는 주석이나 해석이 아니고 해석 이전의 분석 단계일 뿐이다.

* 수사비평 : 구약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문학적 틀을 알아내어 구약 본문의 특정한 단위에 나타난 특별한 예술적 문학을 발견하고 분석한다. 내용보다는 방법에 치중한다.

* 네러티브 비평 : 전승사와 맥을 같이 하고 문헌비평같이 본문을 난도질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 비평은 다소 복잡하지만 성경이야기를 영감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장점이 있다.

* 독자 중심해석 : 해석에서 독자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문제는 독자의 결론이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 신학, 흑인신학, 선교중심 해석 등이 여기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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