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칼 바르트_Karl Barth
바르트가 생각할 때에 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어야 되고, 그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신학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포와 슐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경배라는 것이다. 특별히 슐을 비판하면서 슐은 인간과 하나님 땅과 하늘 영혼과 시간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또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긴급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의 출발을 사변적, 역사적, 심리적인 신 이해에서 출발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 이런 차원에서는 자연신학도 거부한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사고를 통해 신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1921년 10월 바르트가 강의를 하는데 그 제목이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신학이 뭔지에 대해 여러모로 언급을 하는데, 우선 자신의 신학자 됨에 대해서 반성을 한다. 신학자는 기본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말 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당위성,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차마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실존적인 무능을 인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신학자의 기본적인 갈등이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답하기를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일단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신학자로서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여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성경의 내용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성경의 내용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과제이다. 그것의 반대는 (인간의 말) 슐라이에르마허, 자유주의라고 한다. 의식신학이 아니라, 진정한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의 산으로 등산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바르트는 그래서 신학자를 말씀의 산을 오르는 등반가로 묘사를 하기도 한다. 자꾸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다른 각도, 또 세밀한 부분도 경험하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결국 산이 좋아서 그 산에 산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신학은 그냥 산행을 하면서 조금씩 하게 된다. 순례의 신학 - Alle Theologie ist theologia viatorum - 이라고 한다. 이때 순례의 신학이라는 것은 영광의 신학 - Theogia gloriae - 와 반대되는 것이다. 순례의 신학은 불완전하면서도 점진적으로 보완되어져 가는 것이 그 특징이다.
자, 바르트가 이제, 성경관이 어떻느냐 하는것이 중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의 입장은 분명하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일치가 안된다. 말씀 = 성경 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됨 과, 임 이라는 차이이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현재 나에게 말씀하실 때 그 성경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정적인 개념은 없다. 바르트의 성경해석론이 뭔지 보면, 프린트 한번 꺼내어 보세요. 자, 독일어 어렵지만, 한번 보세요.
Vorwort zur ersten Auflage - 첫 판의 서문 바울은 자기 시대의 아들로서 자기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진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다른 무언인데,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선지자와 사도로서 모든 인류에게, 모든 시대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가, 또 거기와 여기의 차이가 고려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목적은, 이러한 구별은 그 본질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데에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말하는 것이 똑같다는 것.) 성경해석의 역사적 비판적 방법은 옳다. 역사비판적 방법은 전이해 혹은 이해의 사전단계, 이해들의 준비에 대해서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문제에서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역사비판적 방법과 낡은(칼빈과 루터시대) 영감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후자를 붙잡기를 결정할 것이다. (역사비판적 입장과 영감설 중에 택하라고 한다면 칼빈과 루터의 영감설을 택하겠다는 것. 이런 면에서 그는 자유주의와의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Religions geschichtliche Schule (종교사학파) 의 성경해석학 입장이 역사비판적인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크고, 보다 깊고, 보다 중요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꼭 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나는 기쁘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자신의 성경관과 성경해석관이 여기에 딱 나온다.) 그러나 나의 모든 관심은 다음으로 방향이 놓여져 있다. 나의 관심은 역사적인 것을 통하여 철저히 살펴보고, 영원한 영이신 성경의 영 안으로 들여다 본다. |
이를 분석해 보자. 첫째, 성경을 역사적인 것을 통해 본다. 그 다음에는 성경의 영 안으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르트의 성경관이다. 이런 바르트의 견해를 가장 비판한 사람은 코넬리우스 반틸이다. 반틸의 책 [Barthianism and Christianity] 와 같은 책을 통해 바르트를 비판하였다. 반틸은 바르트는 고등 인본주의라고 하였다. 반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늘 그런식이다. 말씀을 잘 믿느냐 못 믿느냐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다. 때문에 그러한 반틸의 입장에서는 바르트의 그 뭉텅~하고 모호한 입장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을 통하여 성경의 영 안으로 들여다 보자" 라는 식의 그런 것들 말이다.
바르트의 성경해석과 성경관의 입장의 두 번째는 정통주의의 영감설(축자영감설)이다. 바르트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한다면 후자를 택한다고 하였다.
정리하면, 역사적인 것을 통하여 라는 말은 역사적인 것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역사비판적인 것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감적인 것, 영감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르트의 성경관은 역사비판적 영감설 이다.
왜 이런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나?
첫째, 자유주의 신학, 종교사학파가 택하는 역사비판적 방법은 학문적으로는 좋은 이해를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그 때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본문을 잘 이해하고 오늘날의 삶의 정황도 역사적으로 분석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의 글로 보고, 인간의 경건서로 보고, 강단신학의 교회 설교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정통주의의 영감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적 삶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없이 문자 자체의 내재적 조명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성경의 내용 성경언어, 문헌과 고고학적 해명과 같은 것들을 연구하는 것에 따르는 가치평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성경에 제시된 개념들, 그리고 개념군들을 살펴서 그것을 사실에 다가 재어보고, 거기에서 주어진 답을 가장 중추적인 질문에로 환원시킨다고 한다. 사실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 정통주의 자들은 성경속에서 영적인 메시지만 끄집어 낼려고 한다. 그러나 종교사학파와 같은 자들은 우선 성경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에서 그 내용을 이해 할려고 한다. 바울이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 라고 하면 종교사학파는 바울은 예수님의 가치와 다르고, 그는 당대의 로마의 여자 차별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중주척인 질문이 있을 것이고 한다. 그런 중추적인 질문을 끄집에 내기 위해서 그는 십자가, 부활과 같은 사건에 대해, 그것이 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의 답변을 찾아서 오늘날 현대인에게 맞게 제시해 보이는 것이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다. 신약에서만 볼 때에도, 바르트는 현대인의 사고에 거침돌이 되는 여덟 가지의 사고가 있는데, 그 중 세례와 성만찬, 하나님의 아들됨, 권력에 대한 바울의 태도 - 당시 바르트는 히틀러와 싸우고 있었지만, 바울은 위로부터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했기 때문에 - 와 같은 것들이 있다.)
바르트는 정퉁주의가 말하는 문자적 이해, 개별적 해석을 버리고, 종교사학파가 말하는 역사적 해석도 능가한다고 한다. 사실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이 사실이해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본문의 중추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면, 교회교의학에서 바라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적인데, 성경, 설교,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다. 하나님 말씀의 한 형태인 예수님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1절, 14절 계시록 19장 13,14절. 계시는 사실 예수님의 인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구원의 중보자일 뿐아니라, 계시의 중보자이며, 그 분 스스로가 계시이며, 말씀이시라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화해한다.
둘째,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다. 그는 성경을 선지자와 사도들의 증거로 보았다. 이 증거는 예수그리스도가 그 중심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소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고 하기는 한다. 구약은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고 신약은 메시야를 회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은 인간의 말로서의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한다. 이런 성경관에서 바르트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전통적, 정통적인 기독교의 입장, 곧 신구약 성경이 그 원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견해를 비판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유이다. 둘째 계시의 현재성이라는 근거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통기독교처럼 성경에 무엇을 더하지도 못하고 감하지도 못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어디에 간 것이가?' 라는 비판을 던지며, 또한 성경만이 무조건 정확무오하다면 하나님의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를 가진 하나님이 완료된 계시로 간주되는 성경에 구속된 일이 없다. 만일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성경에서 완료되었고, 그것이 전부라면, 성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다 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완료된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유롭다. 그 분은 초월하기도 하시고, 내재하시기도 한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하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다' 는 것은 작게 사용해야 하며(is 를 작게 적어야 한다), 그 의미는 주석적 의미에서의 '이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에 정통주의 영감설처럼 성경이 완벽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는 종이교황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계시의 현재성의 근거는, 계시라는 것은 늘 현재적이라고 바르트는 생각한다. 그래서 바르트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단순한 과거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이 완료된 계시' 라는 말은 과거적이므로 쓰면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인가? 우리가 특정한 성경구절을 읽을 때, 우리 마음 속에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그 부분은 그 순간에 현재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계시이며, 말씀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 나머지 글들은 그 순간에는 성경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유 가운데 말씀하시는 그 부분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 나온 사상이 '로고스와 레마' 라는 것이다. 쓰여진 것은 로고스이고,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탁! 다가오는 것은 레마라고 하는 사상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인식에 따라서 말씀의 가치를 평가하고 구분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마다 다르게 인정되는 것이다. 각자 자신에 맞춘 성경을 만들게 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말씀의 충족성, 말씀의 온전성, 말씀의 등가성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간접적 계시라고 한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시 한다면, 그것은 성경자체가 원하지도 않는 일이며, 그것은 성경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 스스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 성경,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은 각각 그 의미가 다르다.
바르트의 말씀의 세 가지 형태 했지요?
그러면 자, 바르트가 우리식으로 말하면, 성경을 어떻게 보았는가? 바르트는 성경의 여러 부분이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 역사적인 사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는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의 결과들을 받아들였다. 여러분 고등비평 하등비평 배웠습니까? 하등비평은 여러분, 나쁜 것이 아니고,, 고등비평은 성경을 좀, 문제시 하는 겁니다. 저자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여러 문서설을 제시하면서 하는 그런 암튼, 좀 그런 겁니다. 바르트는 고등비평의 결과를 받아들여서 모세의 저작설을 거부하고, 창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가사 있다고 했다. 마가복음은 모델적 복음, 바울 서신중에서 바울이 쓴 것은 몇 개 없다고 하였다. 이 사람의 성경관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선포된 말씀인데(지난 주에 말씀드린것은 계시된 말씀 예수, 쓰여진 말씀 성경이다.) 이것은 주일 날 선포되는 말씀 뿐 아니라, 강의, 논문, 전도, 잘 때 듣는 이야기 같은 모든 기독교적 증거들이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슴하시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들은 성경과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도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가지의 형태를 말하면서 다른 두 가지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쓰여진 말씀은 예수님 없이는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선포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가 서로 도움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 형태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은혜롭게 만나신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비판하자면, 이렇게 세 가지고 나누다 하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는 이것을 쓸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셋 모두를 동일선상에 위치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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