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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성경자료

스콜라 철학

by reviewer_life 201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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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

 

 

 

1)개요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철학체계. 종교 교리의 근원을 찾고 신앙과 이성, 의지와 지성, 실재론과 유명론, 신 존재의 증명과 같은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르네상스에서 19세기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중세라는 말은 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였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근대 사이의 하찮은 막간극으로 여겨졌으며, 스콜라 철학은 단순히 교훈적 방법을 사용하여 전통적 가르침을 고수하고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시기가 진정한 철학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와 근대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2)본질과 중요성

스콜라 철학은 아주 다양한 현상이어서 간단히 정의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중세 유럽에 ' 그리스도교 학교'에서 가르친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당시 미개인들이 '스콜라'(라틴어로 '학교'라는 뜻)를 필요로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북쪽에서 고대세계로 침입해온 이른바 미개 민족들은 대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자기들이 발견한 새로운 전통을 습득하려고 했다 . 교부신학, 그리스 철학,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 등이 바로 그런 전통이었다. 그래서 중세철학이 최초에 당면했던 과제는 풍부한 전통을 배우고 획득·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콜라 철학은 무엇보다도 전례 없는 학습과정이었고 수백 년 동안 계속된 문자 그대로 광범한 '학교' 작업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발전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기존의 자료를 단순히 모으고 분류하고 배열하는 데서 출발하여 원문과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하는 단계를 거쳐 마침내 획득 가능한 진리 전체에 관한 포괄적 견해(Summa)를 제시하게 된다 . 그러나 중세 후기에 오면 기존의 지식을 탐구하고 논의하는 절차는 광범위하게 제도화되고 고정되어 새로운 문제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직접 경험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4세기에는 스콜라 철학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3)역사와 쟁점

ㄱ)스콜라 철학의 근원

스콜라 철학의 역사를 크게 3단계로 나누면 '초기 스콜라 철학'(800~1200경), '전성기 스콜라 철학'(1150~1300경), '후기 스콜라 철학'(1300~1400경)으로 볼 수 있다. 또 스콜라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고대와 중세의 다리 구실을 하며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는 보이티우스와 위()디오니시우스를 들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철학의 목표인 '획득 가능한 진리 전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명한 인물이 바로 6세기초의 학자 보에티우스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에 결합하라"고 요구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이 요구를 실행했다. 이를테면 그의 〈신성한 저작집 Opuscula sacra〉은 거의 신학적인 주제만을 다루지만 성서 인용은 단 한 군데도 없고 논리와 분석만 있다. 보에티우스가 선포한 신앙과 이성의 결합원리, 그리고 그 자신이 이 원리를 실행한 방식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 능력에 대한 깊은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은 인간이성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계시의 신비까지를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합리주의적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스콜라 철학의 역사에서 이런 경향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기도 했다. 다른 한편 합리주의의 위험을 일정한 한계 내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스콜라 철학이 출발할 때부터 있었다. 이른바 위디오니시오스의 ' 부정(否定) 신학'이 바로 이 경향이었다. 이 인물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부분의 역사가는 그가 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자로서 보에티우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의 저술은 1,000년 이상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거의 성서만큼이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영향력 덕분에 부정신학 또는 철학은 합리주의를 제한하는 평형추가 될 수 있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 자신이 계시하지 않는 한 어떤 이름도 신에게 줄 수 없다. 그러나 계시된 이름마저도 인간의 유한한 오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의 본성에 이르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 관한 모든 긍정적 진술은 부정이라는 교정수단을 필요로 한다. 신학자는 신을 '실재' 또는 '존재'라고 부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들은 신이 실재를 부여해준 사물들에서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자는 그가 창조한 것과 같은 본성을 가질 수 없다. 부정마저도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간이 그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ㄴ)초기 스콜라 철학

위디오니시오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초기 스콜라 철학의 주요 대표자로는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가 있다. 그의 사상은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도 조명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일종의 합리주의에 도달했다.물론 "이해받기를 원하는 신앙"이나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그의 유명한 글귀는 계시의 신비가 모든 추론의 기초가 된다는 믿음을 표명한다. 그러나 안셀무스에서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종교적인 것이어서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사실 스콜라 철학 내부에서 이성을 강조하는 관점과 신앙의 초이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관점 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다. 12세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피에르 아벨라르 사이의 논쟁은 그 대표적 예이다. 베르나르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실천가이자 신비적 명상가였다. 그는 윈리적으로는 철학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아벨라르가 주로 논리적으로 신학에 접근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아벨라르는 인간 이성으로 신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비난했다.당시 논리학은 논쟁의 주요싸움터였다. 아벨라르는 논리학을 현대와 비슷하게 "언어적 표현에 기초하여 사유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런 언어논리학의 관점에서 이른바 '보편문제'를 날카롭게 논의했다. 보편문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뿐 아니라 '인간'과 같은 보통명사를 나타내는 외적·객관적 실체가 있는가? 아니면 공통개념(보편)은 주관적 사유의 실재 또는 말소리의 실재만을 가질 뿐인가? 이 보편문제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주요한 또는 유일한 관심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요관심사는 처음부터 실재 및 존재 전체였다.

 

ㄷ)전성기 스콜라 철학

초기 스콜라 철학은 전체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바탕으로 체계화하고 제도화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때,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전통적 체계에 대항한 새로운 강력한 체계로서 '전성기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저술 번역은 그리스어본을 옮긴 것이 아니고 아랍어 번역을 중역한 것이었으며 그의 저술과 함께 아랍 주석가들의 저작도 유입되었다. 가장 중요한 주석가로는 페르시아 출신의 11세기 철학자 이븐 시나, 스페인 출신의 12세기 철학자 아베로에스, 12세기 정통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마이모니데스를 들 수 있다. 새로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도전을 대담하게 받아들인 중세 최초의 신학자는 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다. 그는 단지 책상물림의 학자가 아니라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했다. 그는 "구체적 사물에 관한 철학은 있을 수 없다"라든가 "그런 문제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준다"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적 원리를 내세웠다. 알베르투스에서 이성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성은 형식상으로 올바르게 사고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실재를 파악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라는 보에티우스의 원리는 신앙을 인간과 우주에 관한 늘어나는 자연적 지식과 끊임없이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된다. 이 모든 새롭고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통합하려고 한 사람이 알베르투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의 필생의 과업은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인간의 신체와 인식능력을 포함하여 자연적 실재 전체를 긍정하는 특수한 세계관을 뜻했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은 이런 종합의 산물로서 거대한 지적 구조물이지만 결코 한정된 지식의 닫힌 체계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연적 이성과 완전 일치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동안 성서적 충동과 철학적·세속적 충동이라는 논쟁의 양극은 확연히 분리되었고 양극 모두 아퀴나스에게서 전거를 찾을 수 있었다. 아퀴나스는 파리에서 "신학적으로 기초된 세속성과 세계에 개방된 신학"이라는 자신의 관점을 시제르 드 브라방의 철학적 세속주의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신학자 보나벤투라의 전통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맞서서도 옹호해야 했다.보나벤투라는 아퀴나스가 모든 자연 사물의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신의 권리를 침해했으며, 신학자는 신학주제에 관련된 창조 부분만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학자가 자연 사물을 탐구하는 데서 얻는 이익은 미리 규정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신앙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필요로 한다. 창조에 관한 오해가 사람들을 신앙의 진리에서도 벗어나게 할 수 있다."이런 대답은 낙관적 합리주의처럼 들리지만 아퀴나스는 늘 부정신학의 교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무엇인지를 모를 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도 모른다.

 

ㄹ)후기 스콜라 철학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틈을 메우는 데 실패했다. 14세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 부정된다.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은 이성의 과잉에 맞서기에는 부족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필연성의 관념을 함축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둔스 스코투스는 '자유'의 이름으로 2번째 교정을 가했다. 그는 자유를 주로 신과 관련시켰다. 구제·은총·창조 등은 신의 절대적 자유의 작업이므로 어떤 것에도 '필연적 이유'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과 사변적 이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짓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오컴의 '이중진리설'이다. 오컴에 의하면, 개별 사실들만이 '실재적'이고 그것들의 정합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은 계산하거나 연역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성이란 구체적 실재를 만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오컴의 이런 토양에서는 오직 '긍정' 신학만 가능하다. 사변적 이성과의 협력은 비신학적인 것으로 거부된다. 신앙과 지식은 완전히 다르고 둘의 결합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로써 1,000년 이상 노력해온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붕괴되었고 중세 스콜라 철학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지속적 특징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뒷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데카르트·로크·스피노자·라이프니츠 등 근세 고전 철학자들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나아가 스콜라 사상으로 되돌아가려는 2가지 주요운동이 있었다. 하나는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바로크 스콜라 철학)이고 또 하나는 19, 20세기의 신스콜라 철학으로, 둘 다 주로 아퀴나스의 저작에 관심을 가졌다.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대표자는 톰마소 데 비오(또는 카예타누스),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등이었다. 이들은 반종교개혁법에 깊이 관여하는 동시에 자기 시대의 문제, 즉 국제법, 식민주의, 부당한 정부에 대한 저항, 세계 공동체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은 계몽주의 철학과 독일 관념론에 의해 소멸했고 이에 대응해서 19세기에 신스콜라 철학이 발생했다. 주요대표자는 독일의 예수회원 요제프 클로이트겐으로서 "토마스에 따른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을 내세웠다. 그결과 연구소와 대학 등지에서 스콜라 철학연구가 활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쇠퇴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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