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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행 5:1-8)

by reviewer_life 201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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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거룩해야 한다(행 5:1-8)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나뉘고 교회가 분열하게 된다면 교회는 그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고 그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히려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것처럼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부터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데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여기 '거룩'이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많이 들으면서도 실상은 잘 알지 못하는 말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래서 '거룩'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거룩하게 되어라...", "거룩하게 살자...",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온갖 그런 말들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러나 막상 '거룩'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그 의미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막연하게 이런 뜻일 것이다 하는 느낌은 드는데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룩'이 도대체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평신도로 살아가는 동안이라면 그게 그렇게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되어서 설교를 하려고 하니 이것을 분명히 알고 가르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냥 생각 없이 살아가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교해야 되는 처지에 이르고 보니까 비로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겁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이 말이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가리켜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 사람에게는 '거룩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장소에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성소', 이것이 어떤 건물에 사용될 때에는 '성전'이 되었고, 이것이 어떤 물건에 사용될 때에는 '성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이라고 하는 형용사로 사용되기도 하고, '거룩하게' 이런 부사로도 사용되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거룩'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다양한 경우에 '거룩'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래서 '거룩'이 가지고 있는 그 영광스러운 의미와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사명들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그 어원이 '분리'하고 또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이나 구별하고 분리했다고 해서 거기에 '거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사용되면서 하나님의 탁월하신 도덕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들어가실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도덕적인 성품의 탁월함과 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상태를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세요. 그 속에 도덕적으로 흠잡거나 혹은 혼잡한 것들이 전혀 없는 순수하고 순결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은 흠 있고 티가 있는 것들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의 악을 깨닫고 자신이 행했던 모든 죄악들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죄악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하고 탄식합니다. 그 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였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가장 탁월하게 그에게 나타났었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이 그의 마음 속에 와서 부딪힐 때 그는 그만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왜 우리들도 그런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모두 다 옷을 잘 차려입고 왔습니다. 아주 정성스럽게 세탁을 하고 잘 정리해서 깨끗하게 단장한 옷을 입고 참석했는데, 나는 그만 정신없이 가느라 그냥 허름하게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그냥 맨발에 슬리퍼 찍찍 끌고서 나타난 거예요.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거 내가 여기 못 올 데 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물론 요새는 그런 것 전혀 신경 안 쓰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자기의 삶을 정돈하고 반듯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볼 때 이사야 선지자는 참 깨끗하고 정말 순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면한 이사야 선지자 자신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발견한 거예요. 그리고 그 죄가 너무 크고 더러워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은 거룩하다

이와 같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예외적으로 쓰이는 용어인데, 이것이 그 예외를 넘어서서 사람들이나 혹은 사물들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 사람이나 사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되었을 때, 즉 하나님께 드려졌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것이 사용될 때 '거룩'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향하여 거룩하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드려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이 종, 제가 학생 시절에 교회에 있는 이 종을 '성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아마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성종, 거룩한 종이라 이거죠. 그래서 이것을 만지면 큰일 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에 종이 올려져있으면 손대는 것조차도 죄송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죠.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물건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할 수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에 있었던 성물들과는 좀 다르죠. 이것은 그 때의 성물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성물이라고 하면 성전을 구성하는 물건들이 성물이 되는 것이죠. 법궤라든지, 아니면 법궤 좌우에 있는 그룹상이라든지, 아니면 일곱 개의 금 촛대 같은 것, 일곱 개가 아니라 사실은 한 개고 가지가 일곱 개예요. 가지가 일곱 개가 달려 있는 등잔입니다. 그리고 번제단과 같은 이런 모든 것들이 성물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것은 성물이기 때문에 아무나 손을 대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심판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서 손댈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옮길 수 있는 자격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법궤 같은 경우는 제사장 이외에는 그것을 다룰 수 없었어요. 제사장조차도 손으로 대면 안 됩니다. 손대면 안 되는 거예요. 왜 우리들도 예식을 진행하면 장갑을 끼지 않습니까? 이건 뭐냐면 장갑을 안 끼고 맨손으로 아무 거나 손대면 그 예식이 정돈되지 않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장갑을 끼고 그렇게 해서 그 예식을 아주 격식 있게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구별하고 혹은 그의 어떤 허물들과 잘못들을 좀 가리는 그런 역할을 하잖아요. 성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흠집이 있는 것들은 드릴 수 없는 거죠.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에도 이 제물은 흠이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령 다리를 저는 것, 상품가치가 없잖아요.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하면 그것은 제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흠이 없고 아주 건강하고 새끼를 잘 낳을만한 그런 제물을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드렸던 거예요. 그 때 그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드리는 자세

오래 전에 제가 어느 교회 있을 때 심방을 갔는데 마침 그 분은 화교하고 결혼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는 중국 제품들, 대만 제품들 이런 것들이 좀 있었는데, 심방 예배드리고 나서 차를 한 잔 내 오시는데 대만에서 가지고 온 아주 좋은 차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티백 차였는데 넣어 놓은 그 자그만 박스가 너덜너덜하게 되어 있어요. 뚜껑도 떨어져나간 그런 통에다가 티백 몇 개 들어 있는 걸 가지고 왔어요. 그걸로 차를 타 주는 겁니다. 그래 차를 마시고 나서 또 인사말을 했죠. "차가 과연 맛이 있습니다." 했더니 "목사님, 이거 맛있는 차인데 드릴까요?" 그리고선 이 분이 심방 끝나고 나오는데 통에서 티백 댓 개 꺼내가지고 손에다가 쥐어주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이거 가지고 가세요." "됐습니다. 집사님 두고 드십시오." 그러는데 부득불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 받아들고 손에다가 이렇게 들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골목을 나오면서 '내가 제대로 받은 건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그 분은 큰 마음을 쓰고 그렇게 준 겁니다. 큰 마음 쓴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큰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거예요. 그것은 사실 옆집 동네 아줌마가 놀러왔을 때 그 때에나 그렇게 주고받는 것이지 사실은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려야 되고 하는 그런 관계에서는 그렇게 하면 실례가 되는 거잖아요? 물론 그 분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랬다고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알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이와 같이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사실 고르고 고르고, 정돈하고 정돈하고, 다듬고 다듬어서 드려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에게라면 최고의 것을 구별하여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는 미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는 거룩하게 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라면 그 마음, 그리고 그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거지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방법이 있어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사람을 드릴 때 외적인 상황도 살펴보았습니다. 가령 손이 하나 끊어져 없다든지, 눈이 이상이 있어서 한쪽은 까만데 한쪽은 하얗다든지, 그렇게 외모에 흠결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어요. 왜? 거룩하지 않다 이거죠.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런 외적인 것들로 거룩을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의 거룩을 판정하는 기준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어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양심이 과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섬기는 자로 과연 자기의 마음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자기의 생각과 삶을 과연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나님을 모시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지는 경우와 비교되는 물건들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물건들이나 혹은 직분이나 혹은 어떤 날들을 우리는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일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일이 있고 또 예식 중에 우리가 헌금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건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경우가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직분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거룩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과 양심의 악을 깨끗하게 씻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으로 자신을 드리고 자신의 도덕적인 삶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는데 물건이나 기타 일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것을 드리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거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령 지난 8일 우리가 교회에서 장로님들, 또 시무집사님들, 권사님들 임직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외적인 의식으로써 이분들에게 그 직분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분이 정말 거룩한 직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어야 됩니다. 그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지 아니하면 그 직분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그 직분을 죽은 이후에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비문에도 '목사 OOO', '장로 OOO', '집사 OOO' 이렇게 쓰잖아요. 한 번 집사면 영원한 집사예요. 그런데 그것이 진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직분을 받은 사람의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직분을 받은 사람의 거룩함이 없으면 그 직분이 욕을 먹고 그 직분을 준 교회가 욕을 먹게 되어 있는 거예요. 가끔 신문에 그런 기사가 납니다. 무슨 절도, 혹은 사기, 혹은 폭력... 이런 범죄 사건에 집사님이 등장하고 장로님이 등장하고 목사님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거죠. 그러면 그게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도덕적인 범죄거든요. 심각한 범죄인데 그런 범죄와 연루되면 그 직분 자체로 넘어가는 거예요. "야! 목사가 어찌 그럴 수 있나?" "장로가 어찌 그럴 수 있나?" 이렇게 넘어가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것이 교회로 넘어갑니다. "교회는 다 그래!" 이런 식이 되고, 그것이 더 한 걸음 넘어가서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욕이 되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욕이 되는 거예요. 나는 한 개인으로 그런 일들을 범했습니다만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것, 내가 교회로부터 이런 직분을 받았다면 나는 그 직분을 거룩한 직분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 또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지상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화에 있어서 진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가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는 길입니다. 이전에는 그런 모습이었을지라도 내가 이 직분을 받으면서는 변화되어야 되죠. 이전에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발전해 가야 되는 것이죠. 내가 전에는 그런 일들을 아무런 의식 없이 행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더 탁월한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받은 직분을 거룩하게 감당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릴 때에 정성을 다하고 가릴 것을 분명히 가려서 최고의 것을 드리고자 하는 그것, 바로 그것은 이 거룩함에 대한 인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늘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과 거룩함의 인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과 그리고 섬기는 모든 일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단정하게 정돈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 수 없다 고 하는 것, 자기 삶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겨야 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교회라면 교회도 마땅히 거룩함을 가지고 있어야 되며 거룩함을 추구해야 되는 것이지요. 교회의 거룩함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까 어떤 직분이 한 사람의 도덕적인 잘못으로 인하여 통째로, 도매 급으로 다 욕을 먹고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 또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 잘못하고 실수하고 혹은 악한 일을 행하게 되면 교회 전체가 한꺼번에 넘어가게 되는 거예요. 물론 그것은 세상의 평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대다수의 인식의 문제이며 그들의 삶의 문제가 되면 단지 평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교회는 그 거룩성을 상실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성은 지체들의 거룩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지체들이 타락하고 범죄하고 그리고 비양심적이라면 그렇다면 교회 전체가 그런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 지체들의 도덕적인 타락과 범죄들을 가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정결한 삶이 교회의 거룩함과 영광에 직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될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도 성도들의 삶을 그렇게 지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장 1절 말씀 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여기 '아비의 아내'는 계모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상황에서 자기의 계모를 데리고 산다 하는 그런 말이에요. 사실 이게 입에 올리기도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성경에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실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니 이것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리고 그런 자를 어떻게 교회에서 용납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런 자가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고 어떻게 그런 자가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고 어떻게 그런 자가 교회 안에서 뻔뻔하게 행세할 수 있느냐? 사도 바울이 지금 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사명

우리는 어떤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서 상관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새는 '프라이버시'라고 하면 다 존중해줘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우리는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교회에서의 삶을 분리시켜놓고 개인의 삶의 영역은 상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말씀을 가르쳐서 성도들이 그 말씀을 배우고 그래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그의 가정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실현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목적이에요.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개인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속에서 그 말씀을 실현시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개인의 문제는 웬만해서는 터치하지 않으며, 만약 그것을 건드리는 경우에는 교회가 시끄럽게 되는 이런 상황에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가정의 어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많이 인정하는 나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는데 정도에 지나쳐서 남편이 아내를 막 구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는 이런 데 시퍼렇게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지는 경우들이 있잖아요? 어떤 경우에는 흉기를 들고 막 위협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사적인 영역이 되어 있어요. '부부 사이의 문제인데...'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부부 사이의 문제입니까? 이웃집에서도 '부부의 문제인데...' 그러면서 그냥 넘어가요. 만약 그러다 사람 잡겠네 싶어가지고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관이 찾아오면 남편이 오히려 "부부 사이 문제인데 경찰이 왜 끼어들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그러면 경찰관은 "알겠습니다."하고 가는 거예요. 부부 사이의 문제라고 상관하지 않고 그런 일에 관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학대를 가합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크게 신문에 나오고 문제가 됐었죠. 네 살인가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말을 안 듣는다고 옷을 벗겨서 추운 겨울에 대문 밖에 내 놓은 거예요. 한 시간씩 세워 놓으니까 보다 못한 동네 사람이 신고를 했어요. "어느 집 앞에 지금 아이를 옷 벗겨서 내 놨는데... 이 추운 겨울에..." 이래가지고 그 엄마가 구속이 됐어요. 알고 보니까 그 엄마가 친엄마는 아니었는데, 하는 말은 그거예요. "잠깐 혼내주려고 그런 겁니다." 잠깐이 한 시간이에요. 옷 벗겨가지고... 그런데 그래도 우리는 이웃에서 그것을 건드릴 수가 없어요. 나중에 이 사람이 술 잔뜩 먹고 나타나서 행패부리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두고두고 행패를 부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성도의 가정생활은 단순히 사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도 성도들의 가정생활을 개인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성도들이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냥 넘어가고 교회 오면 다 "집사님, 복 받을 겁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지적하게 되면 그 분하고 평생 원수가 되겠죠?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징계하지 말라." 반드시 부메랑이 되서 돌아온다는 겁니다. 징계했다가는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당할 거다 이거죠. 왜? 앙심 품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옳다구나! 탁 붙잡는 거예요. 마음 속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어요.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어요. 기회만 와라 이거죠. '기회만 와라! 가만 두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두려워해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사도가 그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이런 것들은 엄하게 책망하고 징계를 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 개인도 자기의 잘못을 깨우치고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은 권징의 목적이에요. '권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개혁교회에서 교회의 징표 중 세 번째 해당되는 겁니다. 교회의 징표 첫 번째는 '말씀의 참된 선포', 두 번째는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세 번째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인데, 이 '권징'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인 순결성, 그리고 교리의 순수성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여 다른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막상 권징을 당한 그 사람도 자기의 잘못을 깨우치고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지상에서 순결하고 거룩하게 유지해 나아가는 방편이에요.

 

교회의 사명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슨 일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시대와 그리고 공간을 초월한, 교회의 원형이 되는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지상에 나타내는 것이 사명이에요. 그럴 때 보이지 않는 교회의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 본질이라고 불리는 것, '통일성'과 '거룩성'과 '보편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나타내야 되는 거예요.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에서 말씀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한다. 왜? 보편교회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의 본질인 이 하나 됨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거룩해야 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완전한 교회, 이 아름다운 교회의 그 거룩함을 지상에 있는 우리들 교회들이 실제적으로 실현시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에요.

 

지금 사도는 6절에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 내에 이런 악을 용납할 때 사람들은 '그래도 되는가보다...'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면 '전에도 그랬는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나만 붙잡고 그러느냐?" 이렇게 항의를 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픔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누룩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라고 하는 어떤 추상적인 단체의 거룩함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가 되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와 그 용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3.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4.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 이외의 것을 거룩하게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드리는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5.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는 것이 개인이나 교회에 왜 중요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6. 오늘 말씀의 주제와 관련해서 '권징'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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