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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정의와 본질과 종류_조엘 비키

by reviewer_life 201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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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정의와 본질과 종류]

'묵상하다' 또는 '명상하다(muse)'라는 단어는 "곰곰히 생각하다(think upon)" 또는 "반추하다 (reflec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내 속에서 뜨거워 묵상할 때에"(시39:3)라고 말하였다. 묵상은 "중얼거리거나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것은 곧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묵상에는 자신이 암송하고자 하는 성경구적을 낮은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성경은 묵상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창24:63).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감독해야 하는 큰 임무를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수 1:8). 그러나 묵상이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 기록된 것을 다 합친 것보다 시편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시편 63편 6절에서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밤중에 주를 묵상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119편 148절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 반추하는 것, 또는 명상하는 것은 묵상할 어떤 주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정식으로 묵상하는 것은 비중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들은 물질이나 우주와 같은 개념들에 대해 묵상하는 반면,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같은 주제들에 대해 생각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적 묵상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임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피곤해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묵상의 뿌리를 둠으로써, 행동을 희생하면서 명상을 (contemplation) 강조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희생하면서 상상력의 비행을 강조하는 사이비 영성 또는 신비주의 같은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생각과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묵상을 하는 자들은 그의 정서뿐만 아니라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마음의 거룩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참된 묵상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으로 불붙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할 때에는 그 진리들로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며,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묵상은 세 가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세 가지 문은, 이해의 문, 마음과 정서의 문, 그리고 실천적인 생활의 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때에 그를 얻고자 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다른 모든 의무들을 강화시켜 주는 매일의 의무였다. 기름이 엔진을 부드럽게 하듯이, 묵상은 은혜의 방편들(성경읽기, 설교듣기, 기도, 그리스도의 다른 규례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을 쉽게 해주고 촉진해 주며, 은혜의 표지들(회개, 믿음, 겸손)을 깊게 해주며, 모든 관계(하나님에 대한 사랑, 지체된 그리스도들에 대한 사랑, 모든 이웃들에 대한 사랑)를 강화시켜 준다. 청교도들은 두 가지 종류의 묵상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불규칙한 묵상과 규칙적인(의도적인)묵상이 바로 그것이다. "천상의 것들에 대한 갑작스럽고도 짧고 불규칙한 묵상이 있으며; 엄숙하고도 준비되고 의도적인 묵상이 있다."고 칼라미는 적고 있다. 불규칙한 묵상은 "그의 생각을 천상의 묵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지각을 가지고 관찰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시편 8편에서 다윗이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한 것이며, 잠언 6장에서 솔로몬이 개미들을 보면서 한 것이며,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물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토마스 맨톤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형들과 예식들을 가지고 구약 교회를 훈련하셔서 그들이 평범한 것들을 통해서 영적인 생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평범한 기능들과 직책들을 가지고 비유와 유비로 사용하셔서 우리가 모든 직업과 소명 속에서 세속적인 일들을 감당할 때에도 천상의 마음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셨다. 그곳이 상점이든 방이든 들판이든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하시려고 말이다.

 

불규칙한 또는 즉석의 묵상은 상대적으로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든지 실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적인 것들을 영적으로 만드는 법을 빨리 배울 수 있는 반면,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영적인 것이라도 육적으로 만들 것이다. 맨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은혜로운 마음은 증류장치와 같아서, 만나는 모든 것에서 유익한 묵상을 뽑아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을 보는 동시에, 모든 것에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책들은 불규칙한 묵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윌리엄 스펄스토우, 토마스 테일러, 에드워즈 베리, 그리고 헨리루킨 같은 청교도들은 불규칙한 묵상에 대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불규칙적인 묵상에는 위험이 따른다. 조셉 홀 주교는 경고하기를, 그런 식으로 상상력이 통제받지 않고 남겨졌을 때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성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묵상이 말씀에서 떠나 방황하며 미신적이 되기 쉽다고 하였다. 사람의 상상력은 반드시 거룩한 말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들 사이에는 이런 식의(불규칙한) 묵상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을 쓴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청교도 묵상에는 두 가지 다른 전통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 정치를 제외하고서는 신학적으로 중도적인 청교도였던 조셉 홀의 책[거룩한 묵상의 기술]이 청교도들 가운데 묵상에 관한 문학을 발전시키는 물꼬를 텄다고 하였다. 홀은 상상력을 말씀의 내용에 제한시킴으로써 묵상에서의 상상력의 역할을 잘 통제하였다. 그것은1650년대에 글을 쓴 아이작 암브로즈나 토마스 후커, 한 세대 이후에 쓴 존 오웬이나 에드문드 칼라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카우프만은 단언하기를,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의 자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묵상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의 구체적인 명제나 교리에 대해 묵상하였다."고 말하였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차드 십스와 리차드박스터는 성례와 천국에 관한 묵상을 권하는 이 전통에서 탈출했다. 특별히 십스는 비록 우리 영혼은 통제받지 않는 상상력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기는하지만, 또한 "거기(상상력)에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 천상의 것들을 땅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천국을 잔치로 표현하거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결혼으로 표현하는 것처럼,"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이로 인해 엄청난 영적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십스는 기록하였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신앙의 대상을 감각의 대상에 비유하여 상상력을 강조한 것은 십스의 책[영혼의 갈등]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뒤이어 존 번연도 [천로역정]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상상력을 신자의 영적순례와 관계된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에 적용시켰다.

카우프만의 평가에도 일면 옳은 점은 있겠지만, 그는 상상력이 성경을 넘어가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청교도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안셀름이나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나 그 밖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시각화하는 것에 대해 청교도들이 우려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특별히 오감을 통하여 상상력을 열고자 복음서의 이야기들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신것과 시험받으신 것,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등- 을 시각화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다.

더욱이, 홀이나 암브로즈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 두 저자들이 상상력과 감각을 얼마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지를 고려하지 못하였다

 

홀의 [명상]과 암브로즈의 [예수를 바라보기]는 성경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묵상하고 있다. 그러한 균형은 청교도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청교도들은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종류의 묵상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가지는, 규칙적인 묵상이다. 칼라미는 말하기를 규칙적인 묵상은 "일정한 시간을 구별하고, 골방에 들어가거나 개인적인 산책을 하면서, 그리고 거기에서 천상의 것들을 진지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묵상할 때에"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한 의도성은 "꿀벌이 모든 단맛을 빨아먹을 때까지 꽃과 함께 그 속에서 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와 함께 한다. 그것은 "영혼의 성찰하는 행위이며, 그것을 통하여 영혼은 자아에게로 돌아오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원인과 열매와 특징들"을 포함하는 주제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토마스 화이트는 말하기를 규칙적인 묵상의 근원은 다음의 네 가지라고 했다.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진리, 섭리적 경우들(경험), 그리고 설교, 특별히 설교는 묵상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다. 화이트는 말하기를 "두 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는 단 한편의 설교만을 듣고 그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어떤 청교도들은 규칙적인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묵상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 직접적인 묵상, 그리고 묵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반성적인(또는 재귀적인) 묵상, 직접적인 묵상은 "이해의 명상적 부분의 행동"인 반면 반성적인 묵상은 "양심의 행동"이다. 직접적인 묵상은 지식으로 마음을 밝혀주는 반면, 반성적인 묵상은 선으로 마음을 채워준다.

규칙적인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교리적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실천적이 될 수 있다. 토마스 구지는 그의 글에서 규칙적인 묵상의 여러 국면들을 종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정해진 의도적인 묵상은 마음을 어떤 영적인 또는 천상의 주제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당신 자신과 대화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따뜻하게 되고, 당신의 정서가 되살아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결단을 내리고, 죄를 미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기도와 일하는 도중 무의식적으로 뱉는 기도가 다른 것처럼, "정해진 진지한" 묵상은 "불규칙한 마구잡이식의" 묵상과 많이 다르다고 하였다.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경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 둘은 머리와 마음의 필요 둘 다를 섬긴다.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없다면, 묵상은 공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토마스 왓슨이 기록한 대로, "공부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지만,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금맥을 찾으며, 다른 이는 금맥을 찾으며, 다른 이는 금을 캐낸다. 공부란 따뜻함이나 영향력이 적은 겨울 해와 같지만, 묵상은... 마음이 얼어있을 때 그것을 녹여주며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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