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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자료

문화인류학의 발달

by reviewer_life 201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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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의 발달: 현대적 의미의 인류학은 19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인류학의 성격변화

 

1) 지적 환상과 편견에서 해방

지적환상과 편견의 원인: 진화론 인류학자인 Tylor는 문화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야만의 단계-미개의 단계-진화의 단계로 설명했다.

진화론의 문제점은 모든 문화를 물질적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모든 물질적 문화가운데서 얼마나 물질적으로 진보 및 발전을 여하에 따라 판단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게 된 요인은 서구의 자연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발명한 제지를 이슬람권에서 사용하여 서구에 전달했고, 아라비아의 숫자도 인도에서 배웠던 이슬람이 서구에 전달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정서적 요인: 감정

신학적 요인: 교만

선교적 접근 :

해결책: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문화상대주의로 사고의 전환만이 가능

문제의 고민: 그러면 문화상대주는 문제없는가?

 

2) 미개사회와 현대사회

많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미개인과 그 사회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기술문명이 단순하더라도 친족제도나 윤리관등은 서구사회보다 더 발달된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제도나 생활방식의 여러 측면이 기술문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비슷한 점이 많으며, 제도와 생활의 차이는 지능의 우열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의 차이에서 초래된 결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3) 타문화연구와 자기 문화연구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예는 1900년 영국정부와 당시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아샨티(Ashanti)족 (현재의 가나 공화국)들 사이에 발생한 전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황금해안(Gold Coast)이라고 불렀던 현 아프리카의 가나공화국의 총독은 아샨티족들이 다른 모든 권력과 특권을 그에게 양도하면서 유독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황금의자(Golden Stool)에는 절대적으로 앉을 것을 권하지 않는 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총독은 그 황금의자가 아샨티족들에게 최고의 권좌로 추앙되고 있다면 대영제국의 권위를 철저히 과시함으로써 완벽한 통치를 수행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그 황금의자에 올라 앉았고 그러자 무지몽매하고 양순하게 보였던 아샨티족 전체가 무력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영국정부는 식민지의 최고통치자인 총독이 최고의 의자에 앉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아샨티족들이 그렇게 집요하고 강력한 반발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아샨티사회와 문화에 정통한 연구자의 설명에 의하여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즉 그 황금의자는 왕이나 추장이 앉는 왕좌가 아니라 아샨티 사람들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아샨티족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최고의 사당이었던 것이다. 이 신성한 신의 전당이며 민족정신의 상징이 외국인에 의하여 더렵혀지고 따라서 파괴되었다는 것은 아샨티인 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의 정체와 정신적 지주, 그리고 문화와 역사로 해석되는 일체의 것이 파괴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소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영국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를 뒷받침 하는 한편, 모든 관리들은 식민지 정부로 부임하기 전에 반년 혹은 일 년을 해당사회에 관한 인류학적 특별 훈련을 받도록 제도화하였다.

예)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린이의 엉덩이를 만지면 성적 관계를 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한다.

 

타문화를 연구하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문화를 가장 공정하게 보는 안목을 주기 때문이다. 타문화에 대한 연구경험과 이해는 결국자기문화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접근하는 능력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기 문화의 특징을 비교학적인 과정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한편으로는 인간행위의 보편성을 찾아내며, 또 한편으로는 타문화의 독특한 점을 살펴봄으로써 자기문화의 특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도의 연구와 의미의 연구

인류학은 인간을 연구하지만 그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정치조직, 가족유형, 친족제도, 종교체계, 경제조직 등과 같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제도를 연구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어떤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제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제도들이 어떻게 얽혀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를 구성하고 또 유지되어 나가는가 하는 구조와 기능을 관찰하는 것이나, 각기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 인류학자들이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이다.

 

 

 

2. 인류학의 이론과 방법의 발달

 

1) 19세기 인류학과 진화주의

계몽주의 사상의 토양 위에서 생시몽(Saint Simon 1760-1825) 꽁트(August Comte 1798-1857) 등 사회학의 시조들과 흄(David Hume 1711-1776),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퍼거슨(Adam Ferguson 1723-1816)등의 철학자, 경제학자, 사학자들은 과학과 진보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 속에서 사회적인 여러 관계들도 생리학에서 말하는 인체의 각 기관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자연과학에서와 같이 사회도 실증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학자들의 저작들은 가족과 종교를 주제로 삼아서 그 제도들의 발전단계를 상정하여 이에 준한 설명을 시도한 공통된 특징을 가지며 19세기 인류학자들의 이러한 관점을 통칭하여 진화주의(evolutionism)라고 한다.

 

미국의 모건(Lewis Henry Morgan, 1818-1881)

 

영국의 타일러

 

2) 진화주의의 개념과 비판

진화주의 인류학자들의 공통된 관점은, 첫째로 문화가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향하여 진화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진화는 인간이 심리적으로 동일하므로 어떤 문화든지 그것은 동일한 단계를 거쳐 단선적 보편적 발전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문화의 파행성에 관한 개념으로서, 문화발전에는 속도의 차이가 있어서 동시에 발전으로의 출발을 했더라도 어떤 시점에서 각각발전의 정도가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첫째, 물질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는 발전이란 것을 쉽게 평가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제도들, 종교, 윤리 등 비물질적 부분들은 어떤 상태의 것이 발달된 것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20세기 초반: 인류학의 다양화

 

1) 보아즈의 역사적 특수주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진화론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학자는 미국인류학자 보아즈(Franz Boas 1858-1942)였다. 그는 문화적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는 현상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이유에서 문화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만들어 내기를 거부하고 하나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각각 어떤 역사적 특수성에 의하여 변천해 왔는가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각 집단의 특수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역사적 특수주의라고 부른다.

 

2) 전파주의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타일러와 모건을 위시로 한 진화주의가 아직도 유행하고 있을 때 한편으로 많은 다른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차이를 진화의 단계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전파과정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여 이른바 전파주의(diffusionism)를 내세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등문명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원래 이집트에서 계발이 된후에 이집트를 거쳐간 사람들에 의하여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갔다고 주장한다.

 

3)뒤르껭과 사회인류학의 기초

 

 

4. 20세기 중반:이론의 체계화와 경험주의 방법론의 확립

 

1)말리놉스키와 기능주의

 

2)레드 클리프-브라운과 구조 기능주의

 

3)구조 기능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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