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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인물정보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by reviewer_life 201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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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존 오웬은 1616년에 스태드햄의 옥스퍼드주 촌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근면하고 타협하지 않는 청교도 교구 목사였습니다. 열두 살에 옥스퍼드 대학의 퀸즈 대학에 입학하여, 1632년에 문학사를, 1635년에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존 오웬의 최초의 교회 임지는 에섹스의 포드햄이었고 여기서 그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딸 하나만 남고 모두 어려서 죽었습니다. 후에 그는 근처의 코케스 홀 교구로 이사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에 의회 앞에서 설교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올리버 크롬웰에게 소개가 되어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 목사가 되었습니다. 크롬웰의 영향력으로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에 역임되었습니다.

 

1651년에는 오웬은 그리스도 교회의 수석목사로, 1653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1657,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그는 크롬웰과 결별하고는 옥스퍼드를 떠나 사보이 회합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 팜플렛, 주석, 교리 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입니다. 1660년 왕정 복구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 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 활동이 크게 증가된 시기였고, 그의 저술은 당대와 우리 세대의 모든 청교도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1647년에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으며, 이것은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677-8년에 [성령론]의 전반 두 부분을, 1681년에는 [그리스도론], [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라는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고, 1656년에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억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습니다. 1658년에 [유혹에 대하여]라는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1688년에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시편 130편을 강해한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유산은 21세기인 오늘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성경에 충실하며, 인간을 정직하게 해부하고, 신앙의 위대한 일들에 대한 경이로운 지식들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인간해부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오웬은 인간의 본성과 오염, 타락, 죄 등에 대해 교회사 최고의 고배율 현미경을 가지고 분석합니다.

 

존 오웬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위대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깊은 겸손의 필요성을 대규모적으로 묘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문제들과 대처하는 개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예정”, “성경의 무오성”,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독특성등과 같은 교리들을 전문으로 하는, 확고하고도 타협을 모르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오웬은 타협을 거부하여 고난의 길을 자초한 목회자요, 신학자였습니다.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었습니다. 철저한 비타협적 원칙논자였던 오웬의 학문과 지도력과 분석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일성수에 관한 오웬의 글은 의식적으로 규정을 지키듯이 얽매여서는 안 되며, 육체적인 의무 조항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웬은 정치와 실천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자였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의 확대가 오늘날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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