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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두 번째 대표적인 책 [신학 연구 입문]

by reviewer_life 201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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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두 번째 대표적인 책 [신학 연구 입문]

 

 

[신학 연구 입문]

| 입문적 강의를 위한 신학연구의 간단한 서술

 

 

 

 

그는 1810년 베를린 대학이 창립될 때 처음부터 신학대학의 교수 일원이었다. 앞으로 개설될 강좌, 공부에 대해서 소개하기 위한 책으로 쓴 것이 이 책이다. 1811년에 초판 나왔고1830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개정판은 약 한 338섹션까지 나와 있다.

 

그는 신학백과전서라는 수업을 하였고 그 강의의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신학교육이나 철학교육에서 전공의 첫 시간에 주로 개론, 입문 이런 식으로 다루어진 시도가 아마도 슐라이에르마허의 이런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요약하면 슐라이에르마허가 보는 신학은 하나의 유기체이다. 유기체라는 것은 기계체와는 다르다. 기계는 어느 부분 하나가 고장 나면 그것만 고칠 수 있지만, 유기체는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가 잘못되고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신학은 여러 분야들이 상호 연관성 중에서 존립하는데 크게 철학적 신학, 역사적 신학, 실천적 신학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신학의 분과를 나눈 첫 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 에 의하면 신학이라는 것은 다른 제반학문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신학의 중세버전이고, 중세의 다른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였다. 요즘 다른 학문들이 신학을 공격하는 태도가 있는 것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은 하나의 개별 학문으로서 다른 학문 옆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다. 신학은 오히려 다양한 학문 분야들의 합병체로서, 일종의 실증적 학문이다.

 

Positivistische Thoelogia인데 이것은 관념적 신학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완전히 두뇌에서 해결되는 관념적인 신학과는 달리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보며, 그것에는 실제적인 증거가 있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이 실증적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나쁜 말은 아닌데, 그러나 그는 신학은 교회의 실천과 항상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양으로 치면 실학적인 그런 학문이라고 한다. 교회의 지도, 통치, 교회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다. 목사나 교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섬긴다던지 가르침을 섬긴다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제도교회를 비판하였지만, 10년 후에 자신이 교수가 된 뒤에는 제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봉사, 직분 등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은 신학이라는 것은 어떤 신의식에 기초해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실천과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실증적 학문이다.’ 그는 신학을 사변적인 학문에서 실제적인 학문으로 강조를 했다.

 

그는 신학의 네 가지 성격을 말하는데 학문성, 구체성, 총체성, 실제성(교회적 연관성)이 그것이다.

 

 

 

|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대한 세 가지 구분을 보장

 

철학적 신학 - 이것은 비철학적으로 사용되었다. 신학의 기본적인 요소들. , 종교이론과 기독교의 본질규정과 관련한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그가 말한 철학신학이다. 우리나라에 철학신학이란 말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철학으로 신학을 하는가?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철학신학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말에 의하면 신학의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신학을 하나의 유기체로 설명할 때 철학적 신학은 뿌리에 해당된다. (역사신학은 줄기, 몸통, 실천신학은 열매인데 이 둘은 그 뿌리인 철학신학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변증학, 논박학, 종교론 등을 다룬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원리론임을 다룬다.

 

역사적 신학 - 이것은 중간자적 신학으로서, 철학신학과 실천신학을 연결해준다. 이론에 있어서는 철학신학에, 실천에 있어서는 실천신학에 의존해 있다. 보통 우리가 역사신학을 말하면 과거를 중요시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신학을 과거의 측면을 중요시하지 않고, 현재의 측면을 중요시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역사신학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석의신학(성경신학을 자신의 말로 표현한 것) 교회사, 기독교의 현재 상태에 대한 역사적 인식.

 

* A. Conte 가 말한 사회정학은 역사를 수평적, 사회동학은 역사를 수직적으로 이해.

슐라이어마허는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에 우리 교회에 대한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상태에 대한 역사인식을 그는 통계학 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말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입문에서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실천적 신학이다.

실천적 신학 - 실천적 신학은 이 책의 서문에 실천 신학은 신학공부의 왕관이라고 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실천적 영역에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실천신학이라는 말은 슐라이어마허가 제일 먼저 썼다. 실천신학의 창시자는 슐라이어마허! 그는 실천적 적용이 없는 신학은 무익하다라는 말을 했다. 이 때의 실천은 봉사의 개념이며 그것은 바로 교회봉사이다.

 

 

 

 

| 그에 대한 비판

 

첫째, 슐라이어마허가 실행을 강조하는 실천신학을 정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실용주의적 색채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보면, 만일 교회에 가시적인 잘 된 결과만 있다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그릇된 판단이 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신학은 실천적인 열매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학의 주체성을 결과의 측면이 아니라, 성경적 근거에서 봐야한다.

 

둘째, 신학분과의 뿌리로서 철학적 신학을 설정한 것은,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종교일반론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만일 철학적 신학을 종교 일반론으로서 강조하게 되면 결국 종교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가는 통로를 열 가능성이 있다.

 

셋째,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신학에는 성경신학이 대단히 바르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고, 나아가서 그의 신학은 성경에 정취되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이것은 신학을 하나의 초대교회의 근원적인 문서로서만 이해는 것이지, 모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에 근거했다는 사상은 없다. 우리의 신학의 뿌리는 성경이고, 그 왕관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그것이 무슨 교회적 결과의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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