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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7

[좋은 시]_ 인동(忍冬) 잎_김춘수 인동(忍冬) 잎_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이 시는 김춘수 시의 특질로 지적되는 '인식의 시'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끝의 2행을 제외하면, 이 시의 대상이 무엇인지, 시인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이 시는 비유적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한 풍경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으로 제시된 한 폭의 그림에서 우리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나지 않는 짜릿한 감정이입의 순간을 느끼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인 설명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가슴에.. 2014. 7. 4.
[좋은 시]_나의 하나님_김춘수 나의 하나님_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2014. 6. 30.
[좋은 시]_능금_김춘수 능금_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2014. 6. 28.
[좋은 시]_부두에서_김춘수 부두에서_김춘수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셔지지 않는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2014. 6. 27.
[좋은 시]_처용단장(處容斷章)_김춘수 처용단장(處容斷章)_김춘수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三月(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 2014. 6. 26.
[좋은 시]_ 꽃_김춘수 꽃_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한국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기 위한 소재로 꽃을 파악한 것이거나, 심미적 대상으로서 꽃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꽃'을 다루고 있어, 그만큼 심도가 깊다. 여기서 꽃은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 2014. 6. 26.
[좋은 시] 꽃을 위한 서시_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_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이 시는 앞에서 설명한 시 에 대한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화자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2014.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