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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좋은글

[좋은 시]_처용단장(處容斷章)_김춘수

by reviewer_life 201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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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단장(處容斷章)_김춘수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三月(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어나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三月(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감상 평>

이 시는 고대 설화속 인물인 '처용'을 제목으로 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용'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대신, 암울하면서도 몽환(夢幻)에 가득 찬 시인의 어린 시절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어떤 특정한 의미나 주제 의식을 시행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3월의 어느 남쪽 바다에 내리는 눈'을 보고 느낀 인상을 감각적인 언어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연결로써 이미지화하였다. 흔히 김춘수의 시를 '무의미의 시'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시가 심상(心象)만을 제시하는 서술적 이미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도 그와 같이 시의 내면에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 시행들 속에서 어떤 특정한 관점을 추출하여 의미화하려고 하면 이 작품은 더욱 난해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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