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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_18세기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by reviewer_life 201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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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18세기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드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드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11자녀 중 5번 째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청교도적 경건성이 있는 목사였고, 어머니도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타드의 딸이었으므로,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 받을 수 있었습니다. 13세가 되던 1716년 그는 뉴헤이븐에 예일 대학에 입학하였고, 1717년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으며, 1720년 예일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졸업 후 2년 더 그곳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했는데, 바로 그 2년은 에드워즈가 자신의 회심을 체험하였던 시기로 추정됩니다. 1722-1723년 겨울에 자기의 마음과 생활을 통제하는 지침서가 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만든 '결의문'의 대부분을 썼습니다. 이 결의문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에 대한 최고의 요약집,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것 중 복음적 선행 실천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1727년 2월15일에 회중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729년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의 수고에 축복하셔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노스햄프턴 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 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습니다. 1731년 7월에 그는 보스턴의 대중 집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함으로써 널리 알려지며, 자신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알미니안 주의를 반박한 설교들이 부흥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노스햄프턴에 미친 영향들을 상당히 컸습니다. 불과 반년 만에 300명 이상의 남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꼭 200가구로 구성된 노스햄프턴의 전체 주민이 각성하게 되었는데 이 역사는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 불길이 뉴햄프셔 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퍼져 갔으며 또한 커넥티컷 주의 많은 지역으로 타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35년에 노스햄프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책자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적 대각성 보고서가 런던과 보스턴에서 발행되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먼저는 1734-1735년 노스햄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 두 번째는 1740-1741년이었는데 이때에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사역했다는 점입니다. 1740년에 보스턴의 여러 목사들이 휫필드를 뉴잉글랜드로 초청하였는데, 그렇게 방문한 것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것이 되었습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했습니다.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부흥의 영향력은 어떤 현대 비평가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에드워즈가 부흥을 주도한 세 권의 책이 있는데 '성령의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함'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대한 소고' '신앙의 열정'이란 책을 만들었습니다.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작은 사건으로 그가 24년간 사역해 온 자신의 교회로부터 축출 당하게 됩니다. 그 후 에드워즈는 메사추세스 변경 지역인 스탁브리지 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한편 한적한 환경 속에서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동안 밀쳐 두었던 대작들을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의지의 자유'도 이 시기에 써졌습니다. 그 후 1757년 9월에 에드워즈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에 그의 나이 54세에 사망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 영국은 처음의 청교도 정신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형식적이고 복음과 멀어져가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신앙회복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메시지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전체가 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주님의 구원의 사랑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메시지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회복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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