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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보

[추천도서]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해석학

by reviewer_life 2015.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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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이 책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해체주의비평으로 인해 많은 공격을 받고 있는 성경을 변호하고 더 나아가 해체주의의 문제점과 오류를 지적하며 어떻게 책(경전)을 바라봐야 할지 말해준다.

 

 

 

 

 

 

  이 책은 크게 두 분류 그리고 하나의 분류 안에 또 세 개의 커다란 제목으로 나뉘어져있다. 먼저 1부에서는 해체주의 비평이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2부에서는 이 해체주의 비평에 반론을 제기하며 더 나은 해석방법을 제시해준다. 1부 안에는 저자 무위화하기, 텍스트 무위화하기, 독자 무위화하기로 해체주의의 중심이 되는 논리를 끌어다 쓰고 있고, 2부에서 저자 부활시키기, 텍스트 되찾기, 독자 개혁하기 등으로 해석에 있어서 저자가 생각하고 주장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해체주의자 데리다의 논리를 들어 많이 언급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이 해체주의 주장은 하나님의 죽음이 지니는 급진적 함의들을 인정하려는 시도를 대표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을 받아들여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저자성을 부인하고 해체하려고 한다. 이 해체주의는 언어와 사상에 이해 가능성을 제공하는 바탕 체계를 가정하는 구조주의적 전제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후기 구조주의적이다.

 

  역사적으로 성경 텍스트의 권위는 저자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선지자 혹은 사도의 권위가 정경에 어떤 한 텍스트를 포함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공통적으로 주장되었다. 해체론자들은 성경으로 부터 어떤 안정된 의미라도 효과적으로 박탈해 버림으로써 성경이 사실을 진술할 수도, 명령을 발할 수도, 약속을 할 수도 없게 만든다.

 

  텍스트란 무엇인가? 텍스트는 개인 작인자의 작품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코드들의 네트워크이다. 그러나 해체주의와 실용주의에 있어 텍스트는 어떤 실체적인 현전성이 거부된다. 그러니까 텍스트는 단지 독자에게 자신의 상상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수단을 제공해 주는 해석의 탐험 놀이터, 즉 언어의 미끄럼틀, 그네, 모래사장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일 뿐이다. 텍스트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읽고 해석하는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서 단 하나의 해석 절대적 해석이 있고 무정부주의적 해석, 반율법주의적 놀이, 권력놀이, 적합한 해석 등이 있다. 무정부주의적 해석은 해석이 발명에 해당한다는 것이고 반율법적 놀이는 텍스트를 무위화시키고, 텍스트의 모순되는 논리들을 노출시키고, 기호들의 자유로운 놀이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런 일을 행한다. 의미의 인식론의 무위화하는 새로운알레고리주의, 은유적 해석 그리고 욕망의 해석학의 주창자들은 실재 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쾌락원리만을 인정한다. 욕망은 해석학적이며 인식론적이며 윤리적인 규제들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볼 때, 해석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채우는 일에 관한 것이다.

 

  독자를 무위화함에 있어서 해체주의자는 텍스트 바깥에 있는 실제 독자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독자가 텍스트를 완성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독자가 글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해석적 독단론, 해석적 무신론, 해석적 다신론, 해석적 삼위일체론 등이 있다. 여기에서 독자는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싶은대로 성경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페미니스트 등 각자 자신의 일에 있어서 그것을 본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볼 때 해체주의 윤리학은 해석의 전체화 논리와 해석의 종결을 거부하는 문제다. 포스트모던 독자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사한 윤리적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통일성은 없고 각자 입맛에 맞게 해석을 한다.

 

 

 

 

 

 

 

 

 

  2부에서 저자는 해체주의 포트스모던니티의 사상에 반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저자와 텍스트, 독자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의미를 제시하며 논리를 편다.

 

  저자가 삼위일체에 호소하는 것은 텍스트 의미에 관한 문학적 위기가 실재론과 합리성과 권리에 관한 좀더 광범위한 철학적 위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되고 있는 이러한 위기가 거꾸로 명백하게 신학적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니체가 저자의 죽음을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선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길 때 그것을 달성된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의미가 다른 텍스트들과 컨텍스트들에 연결되어 효과수반 발화의 효과들을 성취할 때, 그것을 적용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되찾기에 있어 신개혁주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개혁주의 선배들처럼 배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약간 다른다. 인지적 기능 분량의 편만한 가능성과 참된 원천에 대하여 잘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 왜곡의 위험을 가장 잘 짚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신개혁주의 철학자들은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격언을 기억하며 한 걸음 물러나서 대답하라는 조언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버마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함축되어 있는 내재적인 합리성을 밝힘으로써, 해석이 단지 관례이며 따라서 임의적일 뿐이라는 데리다의 비판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합리성은 인식 주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바로 그 구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성경 해석의 역사에서 폴라니가 묘사한 책임 있는 과학자의 한 선구자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정치 권력과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가운데서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고 고백함으로써 해석학적 덕목들을 요약하였다. 교회는 겸손한 확신을 지닌 해석자-신자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양심은 성령의 인침을 받아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이며, 그들이 쓰는 주석과 그들이 이루는 공동체는 텍스트의 의미와 의의를 점차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일반 성도들이 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 같다. 내용이 많이 어렵고 개념 정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게 되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에 있어서 쉬운 것부터 읽는 방법이 있다.

 

  먼저 7장을 읽어라. 이 챕터는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먼저 1부를 읽게 되면 개념상의 혼란과 만에 하나라도 포스트모던 사상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에 대해 개념을 알고 있고 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처음부터 봐도 상관없을 거 같다.

 

  이 책은 한 번만 읽고 책장에 꽃아 놓을 책은 아닌 것 같다. 수시로 들여다 보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해석하고 또 생각하면서 볼 책이다. 사람이 성장할 수록 단단한 식물을 먹듯이 이 책은 그 신앙의 단단한 식물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개념이 서지 않아 처음에 많이 고민하고 뜻을 몰라 그냥 넘어가기도 했는데 전체 쭉 읽고 나니까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읽으면 좋을지 알거 같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의도로,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삼위일체방법을 통해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성경가운데서 읽는 그 길을 제시해 주는 귀한 책이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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